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는 시대가 되었다. 모든 세대를 초월하여 핸드폰 없이는 사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세상이 된 것 같다. 눈을 뜨면서부터 곁에 두고 사는 새로운 가족기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제는 기능도 다양해져서 통화영역을 넘어서서 결재수단, 게임, 사진, 보고 싶은 영상까지 만능기기가 되어버렸다. 궁금한 사항이 있어 검색어를 입력하면 얼마나 신속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는지 모른다. 핸드폰으로 인해 모든 면이 편리하고 빠른 세상이 되었다. 핸드폰 사용이 일상화되다 보니 다양한 에피소드가 속출한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장례식장에서 영정 앞에 분향을 하고 상제들과 인사를 나누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린다. 그런데 벨음이 “날 좀 보소”였다.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 보~소. 동지섣달 꽃본 듯이 날~좀보소” 장례식장 분위기는 상상에 맡긴다. 누구는 문상을 하려는데 핸드폰에서 “자기야 나야!”라는 벨음이 울렸다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목사님이 설교를 한창하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금방 끄겠지’했는데 계속 울린다. 설교 방해가 된 것은 물론이고 성도들조차 마음이 그랬다. 참다못해 목사님이 한마디 하신다. “누군지 모르지만 핸드폰을 꺼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벨이 울린다. 가만히 보니 강대상에 놓여진 목사님 가방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당황한 목사님이 황급하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귀에 대더니 “예수님, 어쩐일이십니까? 예배 시간에 전화를 다주시고…” 애들 말로 “와 와~”이다.
한 청년이 롯데리아에 들어가서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였다. 종업원이 “시간이 3분 정도 걸린다.”며 번호표기기를 건네준다. 롯데리아 대기번호표 기기이다. 잠시 후 번호표 기기에 불이 들어오면서 진동도 함께 울린다. 순간 청년의 행동은? “여보세요~”하며 번호표대기 기기를 귀에 갖다댄다. 아르바이트생이 웃으며 “손님, 그건 전화기가 아닙니다.” 평일의 한가한 오후였다. 분당으로 가는 지하철에 나이 드신 할아버지 세 분이 나란히 앉아계셨다. 세분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 같았고, 마침 나른한 오후인지라 식곤증에 세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중간에서 졸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막 닫히려는 전동문을 박차고 내렸다. 물론 거기까지는 평범하고 비일비재한 일이다.
문제는 그 중간좌석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던것이다. 금방 내린 할아버지가 워낙 부산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난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그 핸드폰을 보고는 “이런 핸드폰을 두고 내리셨네. 어쩌지?” 혼자말로 “전해주어야 한다.”며 그 다음 역에서 황급히 내리셨다. 물론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 듯하다. 잠시 후에 깨어나신 마지막 세 번째 할아버지가 하는 말 “아이고 내 핸드폰이 없어졌네” 아뿔싸! 안타깝게도 핸드폰의 주인은 마지막까지 졸고 있던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황당해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에 주위 사람들은 내놓고 웃지도 못하고 참느라 얼굴들이 빨개졌다.
핸드폰은 실로 문화혁명을 일으킨 대단한 발명품이다. 사람들에게 편리함과 신속한 처리능력을 제공하는 긍정적인 면을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개인주의 사회로 몰아가는 역기능도 유발한 것이 사실이다. 과거 지인들의 전화번호 수백 개를 입력했던 뇌는 이제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단 몇 개의 번호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세계적인 IT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이 우리의 뇌가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꼬집는다, 많은 사람이 오랜 인터넷 사용으로 독서나 글쓰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핸드폰이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것은 좋은 면이지만 짧은 시간에 원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즉흥적인 사고방식을 키워나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조금은 사용을 절제하며 기계보다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