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흔하디 흔하지만 내가 어린시절에는 계란이 참 귀했다. 어머니가 5일장에 다녀올 때면 달걀 열 두개가 짚으로 엮은 길다란 꾸러미 속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계란은 주로 찜을 해 먹었다. 그래야 온 식구가 고루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노르스름한 계란찜을 숟가락으로 눈치껏,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갈라 입에 넣으면 정말 꿀맛이었다.
어머니는 암탉을 키우셨다. 닭은 신기하게도 하루에 한 알 달걀을 낳고는 닭장에서부터 마루까지 설치며 “꼬꼬댁 꼭꼭…”하며 시위(?)를 벌였다. 마루에 와서 소리를 질러도 소식이 없으면 창호지 문까지 쪼아대며 어머니를 불러댔다. 그럴때면 어머니는 좁쌀을 한 움큼 쥐고 나가 마당에 뿌려 주셨다. 그제서야 닭은 “꾸꾸” 소리를 내며 만족한 듯 조를 쪼아 먹었다.
하루에 한 알씩 낳는 달걀은 아버지 차지였다. 아버지가 퇴근을 하면 어머니는 고이 간직 해 놓았던 달걀을 아버지에게 내어 미셨고, 아버지는 계란 양쪽을 이빨로 ‘톡톡’ 깨서 맛있게 생달걀을 잡수셨다. 단백질 섭취가 여의치 않았던 그 시절에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계란으로 단백질 보충을 시키셨던 것 같다.
하루는 학교에서 와보니 아무도 없었다. 마침 닭장에서 “알을 낳았다”고 ‘꼬꼬댁’대며 닭이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어머니가 하던 대로 마당에 좁쌀을 뿌려 놓고 닭장으로 들어갔다. 둥우리 속에 짙은 살색의 달걀이 누워있었다. 집어내니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뒷곁으로 가서 이빨로 계란의 뾰족한 부분을 깨어 구멍을 내고 하늘을 쳐다보며 계란을 빨았다. 비릿하고 고소한 달걀이 입속을 거쳐 목으로 넘어갔다. 참 맛있었다. 금방 힘도 불끈 솟아나는 듯 했다.
저녁 무렵,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는 닭장으로 향하였다. 닭장을 한참 서성이던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재철아! 너 계란 못봤니?” “아니” “어, 이상하다. 이맘때면 계란이 있어야 하는데!” “날마다 낳나? 안 낳을 때도 있겠지” 시치미를 뗐지만 가슴은 ‘퉁탕’거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또다시 닭장을 드나들며 내 눈치를 보았다. 발각되지 않고 넘어갔지만 부모가 된 지금에야 깨닫는다. 그때 어머니가 알고도 모른척하셨다는 것을.
나처럼 계란을 많이 먹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중 ·고등학교 졸곧 웅변을 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 정호가 어느날 웅변반에 나를 끌어들였다. 새벽이면 학교 뒷산인 「갈산」에 올라 발성 연습을 하였다. “하나하면 하나요, 둘하면 둘이요…” “막파…”를 외치며 발성연습을 하고나면 집에 와서 “목소리가 좋아지라”고 날계란을 먹는다.
그릇에 날계란을 깨어 식초 몇 방울을 떨군다. 젓가락으로 ‘살살’ 저어 마시는데 냄새가 보통 ‘역’한 것이 아니다. 마치 “송장 썩는 냄새”처럼 고약하다. 성대(聲帶)에 좋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렇게 아침마다 계란을 마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입학하자마자 「교내 웅변대회」가 열렸다. 키도 작고 가냘픈 체격에 장애까지 가진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입상을 하는 순간부터 반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어주는 친구부터 점심을 챙겨주는 아이까지 그때부터 활발한 고교 시절의 문은 열렸다.
서울 시내 웅변대회에 추달호 형과 함께 참가하던 날, 반 친구들은 너도나도 계란을 나에게 쥐어주었다. 아마 열 개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를 안아주며 “이 계란 먹고 일등해라”하며 격려 해 주었다. 결국 장려상을 타는데 그쳤지만 그날 친구들이 손에 쥐어주던 따뜻한 계란의 온기는 내 가슴에 아직도 남아있다.
이젠 식당에 가면 흔히 계란이 올라온다. 그런데 옛날 그 계란 맛이 나질 않는다. 내 입맛이 변한 탓일까? 계란 하나로도 행복했던 그 순수했던 시절이 그립다. 작고 소박한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체험을 했다. 지금 누리는 풍요를 은총으로 깨닫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