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음에서 알음으로

by 관리자 posted Mar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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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아름답게 보고 아름답게 사는 것, 이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명성을 날리던 ‘강수진 발레리나’의 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 그녀는 매일 새벽 5:30분에 기상하여 스트레칭을 두 시간씩 하고 걸어서 5분 떨어진 극장으로 출근을 한다.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하는데 때로는 하루 19시간동안 할 때도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 튼튼한 토슈즈가 하루에 3~4켤레가 닳아 떨어질 정도로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강수진은 “남들이 볼 때는 심심한 생활이지만 나는 그렇게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생활을 즐기고 사랑한다. 나는 항상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에 다른 세계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발레를 하면서 참 자유를 느낀다. 때문에 바깥 세상에서 자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일상이 날마다 새롭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충격적이었다. 사실 삶은 반복의 과정이다. 그래서 살다보면 지루하고 무료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녀는 “20년 동안 반복되는 규칙적인 삶이 좋다”고 했다. 그러기에 세계적인 발레리나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리라! “날마다”라고 하지만 사실 같은 날은 전혀 없다. 같은 계절이지만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다양성 때문이다. 알고나면 이토록 아름다운 생을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맞이하고 보내버린다. 무엇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내면의 눈이 아름다워야 한다. 먼저 눈이 예뻐야 한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의 ‘아름’은 “알음”. 즉, 아는 것에서 오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이고, 고려청자도 개밥그릇이다. 그 무엇을 아름답게 보려면 그만큼 알아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은 알려면 그만큼 “앓아야”한다는 것이다. 나무 하나, 풀 한포기를 알려면 정말 앓아야 한다. 앓는 고통이 없이는 알아지는 것이 없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물론 나부터 말이다.

 

 자신에 대해 알려면 많이 앓아야 한다. 장애를 가진 나는 어린 시절부터 많이 울어야했다. 다리가 아파서 울고, 남들같이 달리지 못해 울고, 놀림을 받고 수치심에 울었다. 수많은 시간동안 앓다가 어느 순간 영성훈련을 통해 나를 만났다. 그러면서 봇물터지듯 가슴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글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말한다. “목사님, 꼭 제 이야기 같아요” 그 말이 맞다. 그 말에 힘이 난다. 용기가 난다.

 

 앓아야 한다. 여자가 뱃속에 아이를 임신하면 많이 아파해야 한다. 심한 입덧을 하고 감기가 와도 태아를 위해 약도 먹지 못하며 10개월을 지낸다. 드디어 목숨을 건 출산의 과정을 거쳐 새생명이 탄생한다. 그 순간부터 여자는 엄마가 된다.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며 가슴앓이를 해야한다. 아니 육체적 앓음을 겪어야 하는 것이 부모이다. 그러면서 비로소 엄마의 마음을 읽는다. 엄마를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앓음은 엄청난 의미를 품고 시간을 먹는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며 아름다운 삶의 순간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울며 그 감격을 만끽한다. 힘겨운 과정이지만 앓음의 깊이만큼 알게 되어 자신을 아름답게 보게 되는 것이다. 아는 만큼 삶에 대하여 느끼게 된다.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끔찍한 가정폭력, 부모의 이혼, 실직, 명퇴, 술 중독, 배우자의 외도, 자식의 가출, 사업 실패, 이혼, 사별 등. 아픈 사연들을 안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것이 하나라도 드러날까봐 두려워한다. 처참해진 자존감을 부둥켜 안고 꽁꽁 묻어두고 몇 겹의 보자기로 싸고 또 싼다.

 

 하나씩 벗겨내야 한다. 하나하나 풀어야만 한다. 처음에는 너무나 아프다. 견디기 힘든 수치심에 고통스러워한다. 그 삶의 아픔을 누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아픈 과정을 견디며 앓은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 만나는 나, “이런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