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것이 죄”라고 했다. 의식 지수 400이 이성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화를 내며 산다. 다 알지 않는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보다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 풀리지 않는 환경 때문에 화가 나고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사람 때문에 화가 난다. 화를 안 내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늘 화병에 걸리지 않은 것은 기적중에 기적이다. 왜 화를 내는가? 화가 날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결코 화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게 다 몰라서 벌어지는 일이다. 들어가 보면 나를 못 만나서 일어나는 일이다.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화를 내며 못 견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새로운 삶의 변환기로 활용한다. 이민생활이 얼마나 바쁜가?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그러니까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르며 산다. 이성을 차리고 보면, 그 시점에서 벗어나 보면 그 일이 결코 화날 일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왜 그럴까? 생각과 느낌을 분리할 줄 몰라서이다. 그것을 분리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그 일이 화가 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데 말이다. 이것을 분리하는 사람을 고수라고 한다. 왜 기도를 할까? 도인들은 왜 큰 바위에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집중하는 것일까? 생각과 느낌이 갈라지는 신비한 경험을 하면 내가 확연히 보인다. 이 경지에 이르면 얼굴이 편해지고 희망에 가득 차고 기쁨이 올라오며 행복 해진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결심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우러나와야 진짜이다. 엄마가 자식을 보는 눈,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는 눈. 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그 단계에 이른다. 대학에 들어가면 새내기끼리 MT를 가게 된다. 같은 학번, 같은 과가 되어 같은 룸에 앉아 있지만 자기 소개 시간에 겉모습만 보여준다. 하지만 외딴 장소에 가서 함께 음식을 먹고 깊은 대화를 나누며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나면 저절로 동지애가 생긴다. 그냥 바라보아만 보아도 좋고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온다. 사랑하면 돕게 된다. 부축하며 격려한다.
사랑이란 내 기대치가 차서가 아닌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있으면 사람이 아니다. 홀로 잘난체하면 사람이 아니다. 일단 어울려야 한다. 함께해야 사람이다. 우울증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사람이 싫어진다. 사람이 무서워진다. 단계가 깊어지면 고립되고 어지러운 생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다. 행복해 지고 싶은가?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부터 익혀야 한다.
사람은 다 다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나와 다르기에 인정해주고 품어주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사람만큼 감동을 주는 존재는 없다. 사람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행운은 없다. 동양의 고전 <논어>에 보면 공자 曰 “學而時習之 不亦悅好(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야)”라, 무슨 뜻인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반면, 서양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 철학 중 스토아학파(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스피노자)는 “인간은 이성으로 인해 신과 하나가 된다.”고 했다.
화가 나면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감정이 없어져야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화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들어가 보면 자존심이다. 그런데 자존심이 어떻게 생겼는가? 형체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에 붙들려 싸움을 하고 사람까지 죽인다. 화가 날 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것이 화가 날 일입니까?” 생각과 느낌을 갈라내야 한다. 감정은 순간순간 쉽게 변한다. 이성은 시간이 걸리지만 애를 쓰다보면 기쁘게 사는 노하우를 깨우쳐 준다. 따라서 배워야 한다. 연마해야 한다. 고도의 깨달음에 다다를 때까지 독서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익혀야 한다. 삶의 기회는 단 1회뿐이다. 살아있는 날 동안 배우고 깨달으며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