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춥다, 길다. 지루하다. 하지만 그 겨울이 전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깊은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력이 있다. 겨울은 해를 바꾸는 마술을 부린다. 열심히 살아온 정든 한해를 떠나보내게 하고 신선한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이 겨울이다. 남미에서는 여름에 해가 바뀐다. 추운 겨울의 입김을 느끼며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겨울의 본심을 알 수만 있다면 겨울은 우리 영혼의 외투가 되어주리라! 나무들은 가을이 깊어지면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한여름 동안 무성하게 달고 있던 이파리를 갈색으로 물들인 후 미련 없이 떨쳐버린다. 겨울의 차디찬 바람을 견뎌내기 어렵기에 아프지만 다 떠나보낸다.
지난 금요일 딸에게서 카톡이 왔다. 카톡 끝에 “내일 오는겨?” 사투리로 비껴보냈다. “아빠, 내일은 바빠. ㅠㅠ” 나도 답을 했다. “ㅠㅠ”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서 애들이 어리던 시간이 스쳐갔다. 어쩌다 중요한 모임이 있을라치면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겨놓고 집을 나선다. 아이들이 엄마 옷자락을 붙잡고 앙탈을 부린다. “엄마, 우리도 데리고 가” “안돼, 오늘은 어른들만 모이기로 했어” 겨우 아이들의 손을 뿌리치고 길을 나선다. 한창 모임이 무르익어 갈 때 아이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그때는 집 전화가 다였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아내가 다급하게 달려가 수화기를 귀에 댄다. “엄마, 언제 와?” 나무라고 싶지만 눈들이 많아 침착을 유지하는 아내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 세월이 30년 흘러갔다. 이제는 내 입에서 딸들을 향해 자주 나오는 소리 “언제 오니?” 아, 겨울이구나!
나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자랐다. 겨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계절이었다. 더구나 폭설이 쏟아지면 며칠을 방에서만 지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가족들이 자주 둘러앉는 행운이 있었다. 그 매개체는 화로였다. 눈만 뜨면 식구들은 화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로에 고구마를 묻어 놓고 때로는 밤도 구워 먹었다. 겨울밤이 깊어가면 엄마는 구수한 옛날이야기로 가슴을 데펴주셨다. 내 화술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그렇게 맛깔스러운 표현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시던지!
우리가 어릴 때는 무척이나 추웠다. 장롱에서 내려 깐 이불은 위풍 때문에 차디차기 그지없었다. 이를 악물고 뛰어들어가 10분 정도 오들오들 떨다 보면 체온으로 금방 따스해져 갔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 대야에 부어놓은 뜨거운 물은 금방 식어버렸고 다급하게 씻고 방에 들어서려 문고리를 잡으면 쩍쩍 달라붙었다. 학교도 추웠다. 수업 종이 울리기 전 바람도 잔잔하고 아침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날에는 우리 모두 벽으로 몰려 ‘기름짜기’를 했다. 한쪽 기둥에 서 있는 친구를 일렬로 늘어서서 밀어내는 일종의 게임이다. 그렇게 용을 쓰다 보면 은근히 땀이 나고 거뜬한 몸으로 첫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그때는 다락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다식, 엿, 각종 주점부리가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겨울밤 요긴한 간식이 되었고 때로는 무나 고구마를 깎아 먹으며 우리는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리만큼 처마 끝에 달린 고드름은 크기가 엄청났다. 기나긴 고드름은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서로를 겨누며 휘두르다 보면 시려 오는 손을 호호 불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먹어대는 고드름은 상큼한 얼음과자였다.
겨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내 계절은 고요한 것이라고. 적막과 친숙 해 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적막에 잠기다보면 새로운 미래가 고개를 내어민다. 그렇다. 겨울은 우리를 생각의 골짜기로 인도한다. 3계절을 분주히 살았다면 이제는 다 내려놓고 쉬어야만 한다. 겨울은 기다리는 계절이다. 머잖아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저 땅속에서는 새봄을 향한 아름다운 작업이 분주히 전개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얀 눈이 소복이 덮인 대지에 서본적이 있는가? 덮여있기에 아름다운 설야 속에서 감탄해 본 적이 있는가? 겨울이 전해주는 말-내려놓음, 생각, 기다림, 준비. 그리고 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