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by 관리자 posted Apr 10,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가 내린다. 겨울의 찬 기운에 지쳐버린 나뭇가지를 녹여내며 봄비가 내린다. 조금씩 고운 기침을 하는 꽃나무를 달래듯 타고 내린다. 살아있음의 향기를 온몸으로 피워 올리는 꽃나무를 차분히 적셔간다. 이제 막 깨어나 기쁨에 겨워 잔기침을 하는 나무들을 보듬어 준다. 봄비는 이제 막 꽃몽우리를 터뜨린 꽃잎을 정성스레 쓰다듬는다. 가느다란 봄비의 몸매는 옛 추억 속으로 생각을 몰아간다.

 

 비는 그 모양이 다양하다 못해 신기하다. 장마철에 퍼붓는 소나기는 아이들 손가락만하다. 마당에 자취를 남기며 쏟아지는 빗줄기는 시원하게 대지를 적신다. 반면에 봄비는 가냘퍼 보여서 좋다. 더운 여름에 쏟아지는 비는 가슴을 시원하게 쓰려 내려서 좋지만 봄비는 무엇인가 생각나게 해서 좋다.

 

 어린 시절 비오는 날, 우산을 쓰고 꽃밭에 들어가 나팔꽃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 기다랗고 아름다운 나팔꽃 속으로 비가 스며든다. 그래도 물이 넘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신기했다. 봄비는 조리로 뿌리듯이 내리지만 결국은 옷깃을 적셔내고 만다. 봄비가 많이 내릴수록 따스한 기운이 대지를 덮어오기 시작한다. 봄비가 내리는 날 들판에 서 본 일이 있는가! 생명의 소리가 어우러져 합창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어머니는 실비가 오면 그렇게 읖조리셨다. “님이 가려고 가랑비가 오는구나” “님보고 있으라고 이슬비가 오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릴 때는 전혀 몰랐다. 아버지는 경찰업무에 잦은 야근을 하셨다. 나이가 들어가며 어머니의 허전했던 가슴을 엿보게 되었다.

 

 비가 오면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랐다. 우리가 아지트처럼 확보한 바위에 오르면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고 비를 맞으며 우리는 총싸움을 하였다. 이제는 늙어가고 있을 친구들의 얼굴이 빗줄기와 함께 웃고 있다. 시골 들녘을 적시는 봄비는 어린 가슴에 꿈을 주었다. 소리를 치면 대꾸하듯 들려오던 메아리가 그리워진다. 우리가 외치는 소리에 놀라 달아나던 산토끼의 모습도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봄비가 내리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버스를 타고 경기도 광릉 쪽으로 향하다보면 자그마한 유원지가 나온다. ‘졸졸’소리가 흐르는 시냇물을 지나면 섬처럼 꾸며진 유원지에는 다양한 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저만치 그네도 있고, 뚝을 막아 만들어 놓은 호수에는 오리 모양의 배들도 떠있다. 한켠에는 유격 훈련장 같은 분위기가 나는 코스도 준비되어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처음 그곳을 찾아갔다. 조금 지나서는 여자 친구와 갔다. “노를 잘 젓는다”고 큰소리를 치며 배를 빌려 마주 앉아 노를 저어 보지만 배는 그 자리만 ‘뱅뱅’ 돌아 이내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배는 마음처럼 나아가질 않았다. 그 모습이 안스러워 웃지도 못하는 그 아이의 표정을 읽었다.

 

 생각이 많았던 청년시절, 가슴이 답답할 때면 그곳을 찾았다. 숲속에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들으면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 졌다.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았다. 그러면서 처음 만났던 그곳에 대한 첫인상은 점점 더 희석되어 갔다.

 

 봄비는 ‘초인종’이다. ‘띵동, 띵동’ 하는 시끄러운 소리 대신 “똑똑. 주룩 주룩” 창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봄이 왔음을 알린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빗소리가 평범한 행복으로 이끌어 간다. 봄비는 시계 바늘이다. 아무도 기다리는 이 없어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이 때가 되면 우리 곁에 와서 사랑을 뿌린다. 봄비는 자동 청소기이다. 겨울동안 부서지고 깨진 것들을 모두 쓸어가 주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 준다.

 

 「봄비」-고정희 作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