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호칭이 중요하다. 성도들이 목사님이라고 부르면서 강단에 올라 대표 기도를 할 때에는 그 명칭이 다양해진다. “목사님, 주의 사자, 종”은 이해가 간다. 어떤 분은 “오늘 주의 종님이 말씀을 증거하실때에…”라고 한다. 종은 종이지 거기에 님을 붙이니 헷갈린다. 우리가 어릴 때는 대통령에게 “각하”라는 말을 붙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통령님”이라고 한다. 뭔가 어색하다. 국문학자가 아니기에 어떤 의미로 그렇게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높이려면 높이고 낮추려면 낮춰야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같은 직업인데도 호칭이 많이 달라졌다. 시청 청소원을 “환경미화원”, 때밀이를 “세신사”, 간호원을 “간호사”, 미용사를 “헤어디자이너”, 보험사원을 “생활설계사”, 집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분을 “가사도우미”로 부른다. 호칭을 바꾸면서 그 일에 종사하는 분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
우리 밀알선교단은 장애인선교를 하는 곳이다. 선교회가 아니라 선교단이라고 하는 이유는 40년 전 밀알선교단을 세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그때에는 장애인에 대한 호칭이 거의 없었다. 장님, 꼽추, 절뚝발이, 벙어리, 병신, 바보, 앉은뱅이.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지체부자유자”로 불리웠다. 밀알선교단을 처음 설립한 이재서 박사(당시 전도사)는 <선교단>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붙였다. 그 의미는 올림픽선수단이 대회를 치르고 나면 해체하듯이 밀알선교단으로 출발해서 교회나 사회 전반에서 장애인 선교를 적극적으로 펼치는 날이 오면 밀알선교단은 자동 해체되어야 한다는 긴장 의식을 갖자는 깊은 의미였다. 내가 설교를 하러 가서 가면 목사님들 대부분은 밀알선교회로 부르고 있다.
그러면 이제 더 예민한 장애인 호칭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처음에는 장애자였다. 그런데 한문으로 놈 ‘者’라며 사람 ‘人’이 되었다. 한때 많이 쓰던 명칭이 “장애우”이다. 듣기가 참 좋아 보인다. 친구 ‘友’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분들을 향해 장애우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장애우이신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장애인의 날이라고 하면서 장애우라고 부르는 것도 모순이다. ‘장애인(障碍人)’은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장애우(障碍友)’라고하면 “장애를 가진 친구”가 된다. “나는 장애우입니다.” 이것도 어법에 맞지 않는다. 이제 다시 장애인이 통칭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의 법적인 공식 용어는 “장애인”이다.
그러면 장애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정상인”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그러면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라는 말인가? 정상의 기준이 장애가 있고, 없음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건강한 사람들조차 스스로 말한다. “이 세상에 장애인 아닌 사람이 있나요?” 장애인 사역자들이 가장 흔히 듣는 말이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비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새삼 각인하게 되는 경우였다.
내친김에 장애인을 부르는 말을 정리해 보고 싶다. 현재 잘못 사용하고 있는 용어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양해를 바란다. 장님, 소경, 봉사는 시각장애인. 애꾸눈, 외눈박이도 같은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 사팔눈, 사팔뜨기는 사시장애인. 바보, 얼간이, 등신, 백치는 정신지체인. 정신박약, 저능아는 정신지체로 불러야 한다. 그럼 육신이 불편한 분들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앉은뱅이, 절름발이, 절뚝발이, 찐따는 지체장애인. 곱사등, 꼽추, 곱사는 척추장애인. 외팔이, 외팔뚝이는 지체장애인 혹은 절단장애인으로 해야 한다. 난쟁이는 왜소증. 언어와 듣는 것에 장애를 가진 분들이 있다. 귀머거리는 청각장애인, 벙어리는 언어장애인. 언청이, 째보는 구개파열장애(언어장애인)로 호칭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Disabled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한때 Handicapped라고 불렀지만 장애우와 비슷한 이유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Disability, Challenged가 있다. 같은 상황이라면 누가 들어도 좋고 특히 당사자들에게 보다 부드럽고 순화적인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배려요,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