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가 얼마나 되십니까?” 식구(食口)? 직역하면 ‘먹는 입’이다. 너무 노골적인 것 같지만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밥을 먹고 성장하며 함께 얽혀 추억을 만든다. 그래서 가족은 인류의 가장 소중한 기본 단위이다. 지금은 가스불이다. 오븐이다.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는 거의 가마솥에 밥을 했다. 커다란 솥에 쌀을 앉히고 어렵사리 불쏘시개에 불을 붙여 ‘호호’ 불어대면 장작에 불을 붙기 시작한다. 이내 물이 끓기 시작하고 가마솥 뚜껑이 들썩이며 김을 뿜어댔다. 거의 밥이 될라치면 한창 타고 있는 장작불을 빼어내며 뜸을 들였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 찰찐 밥이 완성되었다. 저녁 즈음에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는 지는 석양과 멋진 조화를 이뤄냈고 온 동네를 진동하던 밥 냄새는 기분 좋은 기억이다.
다들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 우리의 관심은 밥에 있었다. 둘러보면 가난을 벗 삼아 사는 친구들이 꽤나 많았다. 따라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커다란 과제였다. 나는 공무원 아버지를 만나 그런 걱정은 없었지만 아이들의 옷차림은 남루했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던 시대였다. 누구나 하얀이밥(쌀밥)에 고기국을 마음껏 먹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던 때였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의 빈부격차는 도시락(벤또)에서 차이가 났다. 쌀밥은 고사하고 꽁당보리밥이 전부였다. 문제는 밥을 먹고 나면 가스방출(방귀)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조심스러운 소음이 이어지고 쾌쾌한냄새가 교실을 채워갔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이고 강렬한 욕구가 식욕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식욕충족이 전제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희한하다. “배고파 죽겠다”고 하던 사람이 음식을 충분히 먹고 나면 “배불러 죽겠다.”고 말을 한다. 이래저래 한국사람들의 언어에는 “죽겠다”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다혈질이다. 따라서 밥이면 다 통한다. 만족이 안되면 짜증부터 낸다. 그럼 우리의 언어에 얼마나 밥이 많이 등장하는지 살펴보자. 우선 사람들은 만나면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를 나눈다. 요사이 어려운 때라 지인들에게서 안부전화가 많이 온다. 워낙 활동성이 좋은 나이기에 집에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더 염려가 되나보다. 전화하자마자 제일 물어오는 것은 “밥은 먹었느냐?”이다.
친한 것과 관계없이 지나치듯 하는 인사는 “나중에 밥 한번 먹자.”이다. 참 허황된 인사이다. 인사치레로 가장 많이 쓰여지는 말이 “밥 한번 먹자” 인 것 같다. ‘밥 먹듯 하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고도 한다. 만만한 사람을 밥이라고 한다. 상대가 바쁘고 연약해 보이면 “밥은 꼭 챙겨먹어” 영 맘에 안드는 사람에게는 “진짜 밥맛이야!” 무능해 보이는 사람을 향해서는 “저래서 밥은 먹겠냐?” 한다. 일을 부탁받고 “사람이 밥값은 해야지요.”하며 수락을 한다. 일하는게 영 시원치 않을 때 “밥값도 못하니?” 핀잔을 준다.
“그런 사람하고는 밥도 먹기 싫어.” 누군가 나쁜 짓을 저질렀을 때는 “너 콩밥 먹는다.” 심각한 상황일 때 쳐다보며 “넌 지금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냐?” 그 일을 우습게 여길 때 “그게 밥 먹여주냐?” 누군가를 비꼴 때 “밥만 잘 ×먹더라”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그르치는 사람에게 “다된밥에 재 뿌리냐?” 화를 낸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다. 음식을 앞에 두고 꾸짖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도리라는 의미이다. 그러고보면 우리 한국인들에게 밥은 친근의 척도이다. 밥하면 먼저 떠오르는 분이 어머니이다. 추운 겨울 내 밥그릇을 아랫목에 묻어놓고 기다리던 어머니! 그립다. 그러고 보니 우리 민족은 알게 모르게 “밥”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밥심으로 산다고 한다. 2019년 가장 인기있던 드라마는 “밥 잘 사주는 예쁜누나”였다.
밥으로 인연을 맺고 밥 먹으며 정이 들고 밥 먹을 기력이 없어지면 떠나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기승전(起承轉) ‘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