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의 종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희귀병은 늘어만 간다. 지금 우리는 듣도보도 못한 바이러스로 인해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다. 옛날에 가장 무서운 병은 “문둥병”이었다. 표현이 너무 잔인하다. 성경이 새로 번역되면서 ‘나병’(癩病)이라 칭한 것이 다행스럽다. 한센병으로 통칭되고 있으며 거의 완치단계이다. 돌아보면 한센 병 환자들은 많은 멸시와 아픔을 당해야 했다. 내가 어린시절에는 별도 수용시설이 없어서 환자들이 다리 밑이나 산골짜기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리하며 살아야 했다.
온몸을 칭칭 감아 매고, 얼굴을 가리 운 한센병 환자들이 저녁 무렵이 되면 집으로 동냥을 하러 오는 일이 흔했다. 일반 걸인들과 달리 한센 병 환자들이 올라치면 어머니는 봉당에 음식을 내놓고는 방으로 들어오셨다. 문틈으로 내다보면 그분들이 음식을 직접 용기에 담아 몇 번이나 절을 하고 사라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어머니는 불쌍하다는 듯 혀를 차셨고, 그릇들을 끓는가마에 집어넣으셨다. 그 당시에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무서운 루머가 떠돌아 다녔다. “한센병 환자들이 어린아이를 납치해서 간지럽혀 죽인 후 간을 빼어 먹는다”는 소문이었다. 그 까닭에 아이들은 그들만 보면 돌을 던져대며, 천리만큼 도망을 쳤다.
경기도 강상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소아마비 장애아들을 강하게 키운다”는 부친의 교육방침에 따라 지소 옆 사택에서 학교 십리 길을 힘겹게 걸어 다녀야만 했다. 문제는 학교를 오가는 중간에 상여집이었다. 상여는 시체를 묘지까지 나르는 제구인데 가마같이 생긴 그것을 평상시에 두는 곳이었다. 그곳에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곳이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난 장애가 있기에 뛸 수가 없었다. 간혹 그런 우리의 모습을 한센병 환자들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곤 했다. 너무 무서웠다. 나만 두고 달려 나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수 애양원에는 양재평 장로라는 분이 계신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15세 어린 나이에 발병했다. 병원에서는 나병 진단을 내렸고 학교는 귀가조치를 했다.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부모는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1남 5녀 가족으로 단란했던 가정은 어두움의 수렁에 빠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소록도로 갈 맘이 있느냐?”고 물었다. 생명 같은 아들이지만 더 이상 한집에서 살 수 없음을 아신 것이다. 부모라도 고쳐줄 수 없는 무서운 병. 사별보다 더 아픈 이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야무지고 꿈 많은 소년 양재평은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소록도 아닌 여수애양원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1942년 12월 25일 성탄절. 세상은 그를 버렸지만 예수촌 애양원이 그를 맞아주었다. “그래서 죽으려 했지요. 그 심정은 겪어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어요. 쥐약이나 양잿물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뒤돌아보니 “모든일들이 하나님의 자상하신 섭리였고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양재평은 애양원에 들어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손양원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로 1978년에는 장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천형(天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천혜(天惠)였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쉽게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으니 병든 우리까지도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으로 행복합니다.” 어려운 시기이다. 견디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대하는 시각에 따라 복이 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피하지 못할 시간이라면 은혜로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