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베개

by 관리자 posted May 0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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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는 34개의 “밀알선교단”이 활동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일은 대학마다 “밀알 동아리”가 만들어진 사실이다. 젊은이들의 가슴에 장애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는 것처럼 귀한 일도 없다. 오늘은 『이화여대 밀알선교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영실 자매”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이대 밀알선교단의 최고 열심을 가진 전영실 자매는 오늘도 한 장애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전영실은 그를 “훈희 오빠”라고 부른다. “훈희” 오빠는 이대 밀알에서 가장 유명한 인기남이다. 양재동 <하나다방>을 지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이 “훈희” 오빠가 기거하는 곳이다.

 

 일행은 거기가 마치 자기네 집 인양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라면도 끓여먹는다. 또 스타 사진이 크게 보이는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는 등의 무례함도 서슴치 않는다. 오빠와 함께 뮤직비디오를 보기도 하고 속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훌쩍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전영실은 훈희 오빠의 땀에 ‘젖은 베개’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오빠의 열정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란다. 훈희 오빠는 장애가 있어 글씨를 쓰거나 책장을 넘길 수도 없고 오랜 시간 책을 보는 것도 버거워한다. 그러나 그는 배우고 또 배운다.

 

 훈희 오빠는 10분만 공부를 해도 온몸이 땀에 젖는다.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베개와 이불이 축축하다. 놀라운 것은 남들이 한 달에 배우는 양을 오빠는 한 시간 만에 다 배운다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복습과 예습을 할 수도 없지만 일주일이 지나 다시 왔을 때 훈희 오빠는 여지없이 모조리 다 암기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IQ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열정이다. 흘리는 많은 땀이다. 무녀독남 외동아들인 오빠를 위하여 부모님은 모두 열심히 일하신다. 밤늦게 일하고 돌아와 아무리 피곤해도 오빠와 우리들이 공부를 하고 있으면 절대 문을 열지 않으신다.

 

 단칸방이여서 공부가 끝날 때까지 부엌에 계시거나 다시 밖으로 나가신다. 그때마다 죄송스러워서 일행은 일찍 오려 하지만 그게 여의치를 않다. 언제나 때를 놓치고 또 그 시간에 가곤 한다. 그럴 때마다 어르신 분들은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드신다.

 

 하루는 지하철역에서 누가 전영실의 팔을 잡았다. 너무 놀라 돌아보니 오빠의 아버지다. “학생. 밥 먹고 가야지.”하더니 자매를 데리고 고깃집으로 들어 가신다. 불고기 2인분을 시켜놓고는 당신은 젓가락도 안 대시고 자매 혼자만 먹으란다. 약주를 하셨는지 상기된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 훈희가 어릴 때 참 예뻤어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애를 먹었다. 참는 눈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갔지만 불고기 2인분을 남기지 말고 삼켜야 했다. 내내 고개만 숙이고 고기만 씹었다. “학생 차비 없지? 없이 살아도 그 정도는 줄 수 있어” 아무말 못하고 받은 꼬깃한 돈을 쥐고 그날 양재역 화장실에서 전영실은 참 많이도 울었다.

 

 지난 해 4월5일, 훈희 오빠는 침대 휠체어에 누운 채로 검정고시 시험을 치렀다. 간사의 도움으로 발을 딛기도 빠듯한 좁고 가파른 3층 계단을 휠체어에 누워서 내려올 수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불편하지 않은 사람도 몇 년씩 준비하는 시험을 단 몇 달 만에 모두 고득점으로 패스했다.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며 공부해 준 땀으로 젖은 베개의 힘이었다.

 

 밀알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처럼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전영실 자매뿐 아니라 훈희 오빠 땀 냄새를 맡으며 함께 공부했던 동기와 후배들 덕이었다.

 

 훈희 오빠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대검을 준비하면서 더 많은 베개와 이불들이 젖을 것이다. 전영실은 살아가면서 때로는 앞문과 뒷문이 닫히고 옆문까지 닫혔다고 느껴질 때 한겨울에도 축축하게 젖어있던 오빠의 베개와 이불을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전영실은 “훈희 오빠의 젖은 베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느꼈다.”는 고백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