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망설임 없이 메뉴를 고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흐름을 좇아 메뉴를 결정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심각하지 않은 ‘결정장애’를 안고 산다. 예를 들어, 중화요리집에 가면 으레 “자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모습니다. 평소엔 자장면이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괜히 짬뽕이 끌린다.
한국 음식 가운데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대표적인 메뉴는 단연 비빔밥이다. 불고기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주 소개된다. 언젠가 구로다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비빔밥을 두고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음식’이라며 폄하 한 일이 있었다. ‘겉으로는 훌륭한 듯 보이지만 속은 형편없다’는 의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밥 위에 야채와 계란이 얹혀 나올 땐 그럴듯해 보이지만, 막상 먹을 땐 이것저것을 마구 비벼 정체불명의 음식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한국인의 음식 문화, 더 나아가 우리의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를 여행해 보면 음식은 단순히 ‘맛’ 그 이상임을 실감하게 된다. 각국의 향신료나 조리법은 그 민족의 역사와 기후, 삶의 방식과 깊게 맞닿아 있다. 날씨와 지역에 따라 음식 재료와 맛은 달라지며, 그것을 먹는 방식은 정체성을 반영한다.
어린 시절, 정월 보름날이 되면 어머니는 부뚜막에 보리밥과 정성 어린 나물들을 준비해 놓으셨다. 소위 “밥 훔져 먹는 날”이었다. 부엌에서 인기척이 나고 달그락 소리가 나도 모르는 척 하셨다. 물론 나도 친구들과 남의 집에 들어가 그렇게 음식을 먹어댔다. 다들 가난한 때였지만 그날만은 누구라도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취식 할 수 있도록 배려한 풍습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입춘이 되면 임금이 신하들에게 “오훈채”(五薰菜)를 하사했다고 한다. 파, 마늘, 부추, 달래, 무릇—각기 향과 맛, 약성이 다른 재료들이지만 “색깔은 달라도 하나로 어우러지라”는 뜻을 담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이 오훈채의 정신은 비빔밥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로 다른 재료들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전혀 새로운 맛을 탄생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비빔밥의 미학이다.
서양 음식은 대부분 개인 접시에 담겨 독립적으로 즐긴다. 반면, 한국의 식탁은 가운데 국을 놓고 모두가 함께 떠먹는다. 어찌 보면 비위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정을 나누는 공동체의 온기가 있다. 여러 가지 반찬을 비벼 먹는 비빔밥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맛이 분명하면서도 서로 섞이며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낸다.
이를 음악에 비유하자면, 서양 음식이 독주라면 비빔밥은 교향곡이다. 독주는 하나의 악기와 연주자에게 집중되어 섬세하고 세밀한 감상을 이끈다. 그러나 교향곡은 여러 악기가 조화를 이루어 더 깊고 풍성한 감동을 전해준다. 비빔밥은 그와 같은 음식이다. 각 재료가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동시에 전체의 조화를 이루는 식탁 위의 교향곡인 것이다.
오래전 일본을 방문하고 느낀 것은 그들은 회를 유독 좋아한다는 점이다. 자그마한 도시락 하나에도 회가 들어 있고, 깔끔하고 정갈하지만 그만큼 양은 적고 담백했다. 사람들은 스시를 먹을 때 생강이 함께 나오는 이유를 잘 모른다. 회 종류에 따라 입 안을 씻어내고 새로운 생선의 맛을 음미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일식으로 배를 채우기는 힘들기도 하다.
반면, 비빔밥은 그 반대의 미학을 따른다. 다양한 재료를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버무리고 한 숟가락에 온갖 맛을 담는다. 처음 마주할 때는 정갈하고 아름답지만 이내 한데 비벼지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깊고 넓은 맛이 퍼져나간다. 누군가는 그 과정을 두고 “난폭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조화와 포용, 융합의 철학이 숨어 있다.
진정 비빔밥은 맛의 교향곡이다. 날것과 익힌 것, 자연과 문명, 다름과 같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미묘한 조화. 서로 다른 것이 부딪히고 어우러져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신비한 음식. 그 안에는 모순을 끌어안고 조화를 이루는 한국인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