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편의 드라마가 아닐까?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내게 다가온다. 우리 집에는 17살 “쵸코”(요크샤테리아)가 있다. 쵸코가 우리집에 처음 왔을때에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쓰다듬고 안아주고 산책을 하고 인기 짱이었다.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아서 장수하는 것일까? 아이들은 말한다. “아빠, 쵸코를 사람으로 치면 80이 넘은거예요. 아빠보다 더 나이가 든거라니까” 한참을 웃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녀석이 예전 같지 않다. 둥우리에만 엎어져 있고, 뜰에 나가도 뛰지를 못한다.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한 것은 벌써이고, 음식물도 소화를 잘 시키지 못한다. 알뜰살뜰 보살피던 아이들은 시집을 가서 아이를 낳더니 이제 쵸코는 찬밥이다. 물을 떠다주며 말한다. “쵸코야, 옛날에는 다들 너만 찾았는데 네 모양이 이제는 처량하구나” 아는지 모르는지 쵸코는 표정 없이 나를 올려다 본다.
뒷다리에 문제가 생겼는지 앞뜰에 풀어놓으면 휘청거린다. 비틀거리다가 주저앉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다가 이미 고인이 된 부모님 생각이 났다. 아들이 태어났을때에 얼마나 기뻤을까? 애지중지. 그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생후 두돌이 지나며 홍역을 앓던 아이는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왔다.
내가 뒤뚱거리며 걸을때에 그 모습을 보며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저 녀석 다리만 안 아팠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색도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을 부모에게 나는 불효자였다. 당사자인 나도 불구가 된 것에 아쉬움이 컸다. 사춘기에는 울분이 올라오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어보니 나보다 우리 부모님이 더 힘들게 사셨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임신기간 동안 출산을 위한 물품을 준비한다.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먹으며 태아에게 좋은 영향이 끼쳐지도록 애를 쓴다. 드디어 어렵사리 아이를 출산한다. 그런데 장애를 입고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어느날 갑자기 그녀는 장애아의 엄마가 되었다. 김지영 Mom의 고백이다. 그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누구도 장애아를 낳을 준비를 하는 엄마는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뇌병변 장애를 입고 재태주수 32주 5일 870g의 초극소 저체중으로 태어났다. 생후 1개월 무렵 괴사성장염으로 소장 일부와 대장의 대부분을 절제하는 큰 수술을 받았는데 이때 혈압이 많이 떨어져 저산소성 뇌 손상을 입었다. 머리든 몸이든 둘 중 하나라도 성하면 좋으련만, 장이 짧으니 소화 흡수가 어려워 밤낮으로 먹여야 했고 묽은 변을 수시로 지려서 엉덩이가 성할 날이 없었다.
어쩌다 콧줄이 빠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달래가며 콧구멍을 통해 위까지 비위관을 집어 넣어야 했다. 외출 중에 배변 봉투가 터지면 변이 흐를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교체했다. 위급한 일이 터질 때마다 실수로 애가 잘못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렇게 아이는 오늘까지 살아왔다.
장애아가 태어나면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겪는 건 엄마이다. 직장은 꿈도 못꾸고 아이에게만 매어 달려야 한다. ‘내 아이가 장애라고?’ 아이가 2살이 될 때까지는 밤마다 가슴을 치다가 쥐어뜯다가 했다. ‘억울해. 저렇게까지 될 아이는 아니었는데.’ 의료진을 한없이 원망하다가 내가 임신 기간 동안 뭔가 잘못했나 기억을 되짚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극단적인 생각이 불쑥 찾아올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보자’ 결심을 하고 상담도 받아보았다. 상담의 효과는 대단했다. 놀랍게도 잃어버렸던 나를 조금씩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실천과 큰 용기가 필요했다.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는 데 4년이 걸렸다. 그래서 엄마는 신앙의 힘으로, 남편의 격려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김지영 엄마의 고백을 들으며 나는 우리 부모님을 생각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다 위대하다.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는 영웅이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