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사람들이 물어온다. “금년 <밀알의 밤>에는 누가 오나요?” 귀한 관심에 고마운 마음이 밀려온다. 무려 21년이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23회. 처음 밀알의 밤을 열 때에 몹시 긴장하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희한하게도 그날은 단장으로 부임한 지 꼭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배당이 미어지도록 모여오는 인파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많이 어설펐다. 사회자를 세웠는데 콘티를 내가 직접 써 주었다. 완숙한 진행이어서 좋기는 했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멘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회부터는 사회자 없이 진행되었다. 2년 연속 초대되었던 네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중증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능숙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장애를 잊게 해 준 그녀의 피아노 연주와 애교스런 간증, 위트에 관중들은 매료되었다.
주바라기 이지선. 전혀 아픔을 겪은 것 같지 않은 차분함과 이지적인 분위기. 잔잔한 그녀의 간증을 듣다가 사람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 유명해지기 전에 초청되었던 “소향” 두 주간을 함께 지내며 추억을 쌓았다. 참 순수하고 이어폰을 꽂고 오로지 복음성가만을 듣고 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향, 너는 대중가요를 불러도 대히트를 칠 것 같은데” 넌지시 던진 내 말에 미소만 지었다. 말이 씨가 된 듯 2012년 M본부 <나는 가수다!>에 모습을 드러내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
소위 뜨고 난 후에 다시 초청된 “소향”은 전에 만났던 그녀가 아니었다. 프로 냄새가 났다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나 필라 곳곳을 다니며 가을 향취를 느끼던 풋풋한 향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향, 많이 변했네” “왜요?” “전에는 달려와서 허그하고 그러더니” 특유의 화통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와 안아주었다. 이제 소향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톱스타가 되었다.
“시집을 와서 김장 서른번 담그고 나니 할머니가 되더라!” 한 어머니의 넋두리이다. 처음 밀알의 밤을 호기롭게 개최하던 40대 단장은 밀알의 밤을 스무번 치르고 나니 60대가 깊어간다. 세월은 왜 이리 빨리 흐르는지? 하이스쿨을 다니며 밀알의 밤이 되면 무대에 올라 수화찬양을 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장성하여 가정을 꾸미고 아이들 키우느라 여념이 없다.
이민 생활은 척박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민자들, 성도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이민을 온 이후 단 한번도 고국을 방문해 보지 못한 채 수십년의 세월을 살고 있는 분들이 부지기수다. 랭커스터 기독교 뮤지컬은 필라의 명물이다. 손님들이 오면 으레 모시고 가는 곳이 그곳이다. 소문만 들었지 한번도 그런 곳에 가보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분들을 만난다. 그만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는 것이 이민자들의 애환이다.
밀알의 밤은 이벤트가 아니다. 필라델피아 한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최대 잔치이다. 바쁘게 돌아치던 이민의 삶을 잠시 멈춰 세우고 충전하는 시간이다. 온 가족이 편안한 마음으로 한곳을 응시할 수 있는 기회이다. 장애인은 사회약자이다. 건강한 사람은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밀알의 밤을 통해 일년의 한번은 장애인들 곁에 다가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탤런트 오윤아가 우리를 찾아온다. 일단 미인이다. 신앙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픈 손가락이 있다. 소위 잘나가던 그녀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기뻐할 시간은 잠시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아들 “송민”은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이다. 몸부림도 쳐보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기도 중에 깨달았다. 아들은 포이에마(ποιημα)라는 것을.
“하나님의 걸작품”을 그녀의 가슴에 안긴 것이었다. 그때부터 오윤아의 삶을 달라졌다. 아들을 세상에 공개했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걸작품을 키우는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멋지다, 우리는 그녀의 고백을 들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선물이 안겨져 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행복은 지금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밀알의 밤에 정중하게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