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어느 정도 고집은 다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고집하면 안, 강, 최라고 하였다. 이런 성씨를 가진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제 겪어보니 실감이 난다. ‘최’는 우리 어머니가 경주 최씨라 뼈저리게 체험을 했다. 오죽하면 총각 시절 마음에 드는 자매가 있어 접근했다가도 ‘최씨’라기에 기겁을 하고 멀리했을까? ‘안’, ‘강’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다. 역시 쎄다.
그런데 겪어보니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상대에게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온유해 보이는 사람이 어떤 면에서는 외골수 고집을 노출되는 경우를 본다. 고집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격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의지라고 부른다.
고집에는 두 얼굴이 있다. 고집은 때로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나를 가두는 벽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두 얼굴의 고집 사이에서 오래 머물러본 사람 중 하나다. 어린 시절 나는 “고집이 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희한한 버릇은 한번 꽂힌 옷을 계속 입어댔다. 엄마가 “벗어놓으라”고 매를 대도 안 벗고 버텼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냥 밀고 나갔다.
스스로 나는 그것이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목회를 할 때도 그 고집은 신앙으로 굳어갔다. 자부심까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심각했다. 이것은 보수신학을 한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일의 방향을 정할 때도 누군가 내 방식에 이견을 제시하면 마음속에서 이상한 저항감이 일었다.
그때마다 ‘나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합리화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원칙이라는 것은 사실 내 자존심이 만들어낸 벽이었다. 고집은 자기 자신을 믿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지혜를 막는 문이 되기도 하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는 그 순간부터 다른 사람의 말은 점점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으면 결국 남는 건 외로움뿐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삶의 연륜이 쌓이면서 고집이란 결국 ‘나의 방식으로 세상을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의 관계도, 일의 결과도, 삶의 흐름도 내 고집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성숙이다.
그러면서 ‘과연 고집은 나쁜 것일까?’ 질문을 던져보았다. 박정희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정주영의 고집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근대화는 속도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고집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세상은 언제나 나를 흔들어댔다. 사람의 말이 바람처럼 변하고, 상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뒤집힐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고집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 고집이 아집이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체면, 위신, 사회적 지위를 고수하기 위한 고집은 유치하다. 그래서 고집은 깊이 들여다보면 교만과 상통하는 것을 발견한다. 교만하기에 고집스러운 경우가 많다. 그 고집 때문에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힘들어한다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고집은 고상한 것이다.
문제는 고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고집의 방향이다. 내 뜻을 지키려는 고집은 교만이다. 반면 진리를 붙드는 고집은 믿음이 된다. 사람을 밀어내는 고집은 외로움을 낳지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은 관계를 지킨다. 고집의 뿌리가 ‘나’이면 독이 된다. 그 뿌리가 ‘진심’이나 ‘신념’에 있을 때는 약이 된다.
고집은 불편한 거울과 같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나의 ‘진짜 중심’을 본다. 그 중심이 자기 자랑으로 가득하다면 고집은 어둠이 될 것이다. 진실한 믿음과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면 고집은 빛이 된다. 때로는 고집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붙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 두 가지의 균형을 배우는 것이 인생의 지혜다. 그리할때에 고집은 비로소 나를 지배하기보다 나를 성장시키는 선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