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한해의 끝이 보인다. 젊은 날에는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시작한다는 것이 설레이고 행복했건만. 이제는 무덤덤해지고 세월의 무게에 버거움을 느낀다. 솔직히 달라진 것은 없다. 갑자기 체력이 약화되었다든지. 어느 부분이 심히 아픈 곳은 없으니 말이다. 사역을 하며 어디든 갈 수 있는 건강이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금년에도 여기저기 한바퀴를 돌아 들어왔다. 1월 L.A.를 거쳐 과테말라로, 2월에는 마이애미 네이플스 집회. 5월에는 한국 방문. 7월에는 사랑의 캠프를 감당하고, 10월에는 밀알의 밤. 11월에는 북콘서트까지 열고 나니 성탄절이 선뜻 다가섰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경탄으로 산다. 필라의 봄과 가을은 실로 환상이다. 더운 여름에도 숲이 많아 끈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초록의 향연에 묻혀 지나가고, 겨울은 낭만 그 자체인 것 같다. 폭설로 세상이 하얗게 덮여버린 14일. 주일 아침, 설교를 하기 위해 부서지는 눈발이 그림처럼 휘날리는 한복판을 질주하며 탄성이 끊이질 않았다.
연말이어서일까? 요사이 길을 나서면 트래픽이 심하다. 사람들의 외출이 부쩍 많아졌기 때문인 것 같다. 달력 한 장이 남을때는 그냥 그랬다. 이제 남은 시일은 단 5일. 수없이 거친 이별의 훈련이지만 무언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에 상념이 밀려온다. 반면, 힘겨운 일들을 겪어온 사람들은 한해가 가는 것에 후련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 시간이 가까워오면 누구든 한해를 뒤돌아보게 된다. 연초에 가졌던 다짐은 얼마나 지켰는지, 잘한 선택과 아쉬운 순간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와 ‘그래도 이건 참 잘 버텼어’라며 자신을 다독인다. 비교도 하게 된다.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 남들보다 앞서 있는지 뒤처진 것 같은지.
감사가 밀려온다. 나에게 2025년은 뜻깊은 일들이 많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모교인 총신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수상했다. 상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무엇이 그리 자랑스러울까? 부끄러워졌다. 친구들과 지인들이 “무슨 소리? 받아도 진작 받았어야지” 축하에 힘이 났다. 부족하기에 주는 상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아온 내게 주신 하나님의 생의 보너스로 받아들였다.
그리움도 밀려온다. 결코 적지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떠나보낸 사람들이 생각난다. 노래 가사처럼 내가 떠나 보낸것도, 내가 떠나 간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때 끈끈하게 우정을 나누던 친구들은 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런 중에도 이 타향에서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벗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느껴졌다. 일체은혜 감사! 이것이 내 좌우명이다.
연말이 되면 ‘수고했다’는 말이 유행처럼 오간다. 이 말에는 묘한 힘이 있다. 결과가 어떠했든, 견뎌낸 시간 자체를 인정해 주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과로 자신을 평가하려 한다. 숫자와 성과, 속도와 순위로 자신을 재단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있었던 노력과 망설임,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 마음들이 더 선명해진다. 그 마음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송년의 예의가 아닐까?
관계 역시 한 해를 구성하는 중요한 좌표다.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멀어진 사람도 있다. 다가왔다 소원해 진 사람도 있다. 어떤 관계는 조용히 닫혔다. 관계의 변화는 늘 이유를 묻고 싶게 만든다. 붙잡아야 할 인연과 놓아주어야 할 인연을 구분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돌아보면 그 구분을 시도한 흔적 자체가 성장의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가? 그 바쁨의 방향은 어디였을까? 정작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고은 시인의 “그 꽃”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송년은 끝이 아니라 경계다. 경계는 양쪽을 잇는다. 지나온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는 자리다. 2025년을 어떻게 살았든지. 이미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기쁨과 슬픔이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이렇게 다독이자.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많았어” 그 한마디가 새해를 향한 가장 단단한 출발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