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인생을 닮았다. 나무를 가까이하면 삶이 깊어지는 것을 이제야 안다. 나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땅속에 묻혀 있는 “뿌리” 부분과 위로 드러나 있는 기둥과 잎이다. “나무 뿌리가 귀한가? 윗부분이 귀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답은 당연히 “뿌리”일 것이다. 윗부분은 잘라도 다시 자란다. 하지만 뿌리가 상하면 나무는 죽고 만다. 한국 사람들은 가로수를 정비하거나 나무를 다듬을 때에 미관(美觀)을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국은 다르다. 봄이 되어 나무를 정비하는 것을 보면 모조리 잘라버린다. 우리 옆집에서도 지난 해 울타리 근처에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니 입이 벌어졌다. 나무의 원줄기만 남겨 놓고 기둥처럼 모두 잘라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여름이 되니 어느새 나무는 무성한 잎을 드러내고 있었다.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이리라!
나무와 사람이 흡사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나무의 뿌리는 사람의 드러나지 않은 내면이라고 할 수 있다. 기둥과 잎사귀는 드러나 있는 그 사람의 외형과 조건이다. 사람들은 드러난 그 사람을 보고 평가한다. 칭찬도 하고 비난도 한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내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무뿌리가 튼튼해야 하듯이 사람은 정신과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 사실 보이는 장애인보다 내면이 파괴되어 가족을 힘들게 하고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 더 가련하고 심각하다.
겨울이 깊어가며 나무들의 모습이 비슷비슷해진다. 여름에는 잎을 보거나 꽃을 보면서, 혹은 열매를 보며 나무를 알아보았는데 이제는 모두 나목이 되어 겨울을 지내고 있다. 잎과 열매를 모두 떨군 겨울나무는 그게 그것 같고 평준화가 이루어진다. 봄, 여름을 지나며 현란함을 뽐내던 나무나 청초하게 나뭇잎을 피우던 나무나 겨울이 되니 다 똑같아 진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시절, 사람들은 비교의식에 시달린다. 미모, 학력, 체력, 재력에 따라 사람들은 목에 힘을 주기도 하고, 어깨를 늘어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모든 것이 평준화된다. 50대가 되면 “학력이 평준화”된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가방끈(?)이 짧은 사람이나 비슷하다. 60대가 되면 “물질의 평준화” 돈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비슷하다. 외모의 평준화도 가속이 붙는다. 70대가 되면 “체력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 건강한 사람이나 나약한 사람이나 그게 그거다. 80대 이상이 되면 “생존의 평준화”가 된다.
우리는 보통 나무의 잎사귀나 열매를 보아야 그 나무를 알아낸다. 그러나 나무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는 “나무 박사들”의 눈에는 껍데기가 쩍쩍 갈라진 초라한 겨울나무 줄기와 가지만 보아도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리고 만다. “있는 그대로 본연의 나무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겨울나무(裸木)”라면서 무성한 잎을 다 버린 벗은 나무들을 더욱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다.
겨울나무는 인생을 생각하게 한다. 다 버리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얻는 자유. 더는 보탤 것도 없는 넉넉한 가난. 노을이 타는 하늘가에 그림자로 서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가지들. 겨울나무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노래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봄이 올 것을 믿는 까닭일 것이다.
잎사귀의 모습이나 열매의 화려함을 떨어버리고 서있는 모습만으로 그 나무를 기억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다. 어디 그것이 나무만의 이야기이겠는가? 사람을 볼 때에도 그에게 붙여져 있는 수많은 수식어를 뺀 본연의 그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참으로 거짓도 욕심도 없이 만나 풍성하고 넉넉한 생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일체 오해가 없고 편견이 없고 체면 없이 눈치 없이 본연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