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처음 받는 충격은 나를 응시하는 백인의 눈동자이다. 우리 문화는 상대방의 눈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화를 낼 때는 다르다.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이야기를 나눌때가 많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부끄러울 정도로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한다. 의사 표현이 확실하다는 장점이 있다.
여러 명이 함께 웃을 때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게 된다. 관심은 마음을 따라 움직인다. ‘눈 맞춤(eye-contact)’은 가슴에 전율을 일으키는 매력이 있다. 사춘기 또래끼리 모여 앉아 ‘전기놀이’를 한다. 이불 속에 숨긴 손으로 좌우 신호를 보내는 게임이다. 누르는 방향에 따라 흐름을 이어간다. 그때 마주치는 그애와의 시선은 어린 가슴을 들뜨게 했다.
사실 목사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갈망하며 산다. 단에 올라 말씀을 선포할 때에 성도들이 얼마나 설교자와 눈 맞춤을 하는지가 그 교회 분위기이며, 수준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성도들에게 말한다. “설교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 것이다”라고, 사람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관심과 방향이 갈라진다. 설교는 결국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이 중요하다.
젊은 남녀 여럿이 모여 대화를 하다가 크게 웃을 때 각자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사람은 웃으며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쳐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 행동은 의식으로 통제할 수 없다.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본능적으로 정서적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대상, 즉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보내도록 되어 있다. 이 시선은 ‘너와 이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라는 무언의 구애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시선이 곧 마음’이다.
반면 스포츠에서는 이 심리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이른바 ‘노 룩 패스(No-look pass)’이다. 농구나 축구 선수들이 상대 수비수를 따돌리기 위해 눈의 방향은 달리하며 패스하는 행위이다. 베테랑 수비수라도 이 속임수에는 꼼짝없이 당한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 의도가 있다’라는 믿음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공보다도 ‘사람의 눈’, 즉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오래된 본능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에 따르면 부모와 아이가 눈을 맞추는 순간에 두 사람의 뇌파가 같은 리듬으로 동기화된다고 한다. 뇌는 그 짧은 순간을 ‘안전’하고 ‘연결된’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아이의 눈 맞춤은 그래서 중요하다. 어린 아이가 건강하다면 눈 맞춤부터 정서발달이 시작된다.
엄마와의 눈 맞춤속에서 아이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누리게 되고 가족들을 인식하며 시선의 폭이 넓어져 간다. 부모의 시선 속 안정감은 아이의 전전두엽을 자극해 감정 조절과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정서예열이라는 학설이 있다. 누군가와 매일 10초 이상의 눈 맞춤을 하면 하루를 시작하는 자연스러운 “정서 예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누군가와 10초 이상 시선을 마주쳐 본 적이 언제던가? 영성 훈련에 들어가면 우선 처음 만난 옆 사람과 마주 앉아 시선을 마주치게 한다. 그리고 느낌이 어떤지를 묻는다. 당사자의 감정과 관계없이 반응은 다양하다. 어쩌면 사람은 눈으로 말하는 존재인 것 같다.
사람들은 왜 남의 얼굴을 바라보기를 꺼리는 것일까? 현대 기계와 과학 문명이 만들어낸 ‘편리함’ 때문인 것 같다. 굳이 얼굴을 마주할 필요없이 업무나 지시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시선은 마음을 따라 지금도 움직이고 있다. 마주 보아야 진정한 사랑이 싹튼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그래서 명시가 되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