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절친 목사에게 짧은 톡이 들어왔다. “그려려니하고 사시게”라는 글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형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부친 목사님의 연세가 금년 98세이다. “혹 무슨 화들짝 놀랄만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럴수도 있지 하고 사시게나, 혹 무슨 분통이 터질만한 일이 있더라도 쓸데없이 다투고 상처받고 힘들어하고 그러지들 마시게나, 이만큼 살았으면 이제 그럴때도 됐지 않은가? 이 사람아” 음악적인 재능에 미술 감각도 탁월하고 설교 또한 잘하며 진취적인 삶을 사는 아들을 바라보며 애비로서 염려와 사랑을 담아 보낸 글이었다. “그러려니”라는 단어가 많은 상념에 젖어들게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이가 어릴 때는 허둥대고 청년 때는 겁 없이 뛰어들던 모습에서 이제는 진득한 포용성을 가진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다. 물론 체력이 옛날같지 않으니 생각과 행동이 느긋해지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받는 축복은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난 세월 너무도 많이 넘어져 보았기 때문이다. 늙어가는 것이 오히려 멋있게 느껴진다. 유튜브에서 7, 80년대와 관련된 영상이 잡힐 때가 있다. ‘아, 맞아. 그때는 저랬지!’ 마냥 행복해진다. 해서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살게되나보다.
나는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실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술과 담배, 음악, 그리고 친구.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성탄절을 한번도 교회에서 지낸 적이 없는 실로 날라리 신자였다. 고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음악을 한다고 쫓아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틈만나면 기타를 둘러메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버너에 밥을 지어 먹고 술 한잔을 걸친 후에 석양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른다. 워낙 울림통이 좋아서 기타소리와 어우러져 내 노래는 골짜기를 타고 감미롭게 퍼져나갔다. 텐트 밖으로 고개를 내어밀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며 밤은 깊어갔다. 여행을 하며 깨달은 사실은 ‘악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행은 그만큼 사람들의 가슴을 넓혀주고 여유롭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갑작스러운 소명(Calling), 물론 그 전에도 몇 번인가 싸인은 있었지만 22살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전격적으로 신학도의 길을 택한다. 성직을 가는 자의 평생 과제는 버리는 것이었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내려놓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목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일반목회와 특수목회의 길을 걷고 있다. 목사가 된지 어언 34년! 그럼 이제 성자가 되어있는가? 여전히 미숙하다. 돌아보니 실수투성이요, 함량미달이다. ‘그때 그렇게 처신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되었는데’ 등등. 회한이 밀려온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목회의 길은 좁은 길이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는 온전한 목회를 할 수 없다. 가끔 장성한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린 시절에 겪은 서운함이다. 가족보다 성도, 개인의 삶보다 교회를 우선으로 살아야 하기에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일 것이다. 고 옥한흠 목사님이 변변한 가족사진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감격, 보람이 목회의 최대 매력이다. 만나면 상대를 마음껏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성직자의 가장 큰 특권이요, 행복이다. 그분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 아닐까?
“‘그러려니’하고 사시게” 기가 막힌 충언이 아닌가? 산전수전 겪고 나니 새로운 것도 없지만 그리 마음에 담아두고 살 일도 없는듯하다. 집착하고 미워하고 심상을 상하며 살 것까지 무엇이 있으랴!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을 것이다. 털려 들면 먼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의 눈에 들긴 힘들어도 눈 밖에 나기는 한순간이 인생 아니던가? 그냥 이제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당해도 “그러려니하고 사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