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한국에 가면 좋기는 한데 불안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정든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는 곳, 그리운 친구와 지인들이 즐비한 곳, 내가 태어나고 자라나며 곳곳에 추억이 서려있는 고국이지만 일정을 감당하고 있을 뿐 편안하지는 않다. 왜일까? 내 집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주거지가 있는 곳이라야 안정감을 느낀다. 만약 한국에 내가 편안히 거주하며 출입이 자유로운 공간이 있다면 느낌은 달라질 것이다. 영주권을 받아 오랜만에 찾아간 한국은 얼마나 행복하고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가는 횟수가 늘어나며 숙식이 부담스러웠고 이동 수단도 미국처럼 자유롭지 못하기에 피곤함을 느꼈다. 그러면서 생각해 낸 것은 인생도 결국 집을 짓는 것임을 떠올리게 되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는 터를 장만하고 그 터에 알맞은 설계도가 필요하다. 이어 그 설계에 맞는 소재들을 찾아서 각 영역 기술자들을 영입하며 하나하나 건축을 해 나가야 한다. 내집이든 세를 들어 살든 한 채의 집이 지어지기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노고가 필요하다. 언젠가 밤나무 껍질로 지어진 집에 사는 할머니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어릴 때 타고 놀던 밤나무 껍질로 지붕을 엮어 살아가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밤나무처럼 벌레가 많이 끼는 나무도 드물다. 알밤의 달콤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날, 비바람을 이겨내고 온갖 해충들의 침입을 견뎌내어 영근 인내의 열매이다. 그렇게 소중한 알밤이기에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가시껍데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리라!
인생이 집을 짓는 것이라면 그 집을 짓는 사람들의 종류도 다양하다. 첫째, 집터도 구해 놓지 않고서 이쁜 집을 짓겠다고 설계부터 하는 부류이다. 두 번째 부류는 남의 집터에 설계도도 없이 되는대로 그때그때 자기 생각대로, 때로는 남의 말들을 들어가면서 대충 집을 짓는 사람이다. 세번째 부류는 먼저 자기가 짓고 싶은 집의 용도, 크기, 모양 등을 알고 그 집터를 구해서 거기에 알맞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설계도를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수없이 변경을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사는 사람이다.
새들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집을 구하기에 애쓰는 모습을 본다. 그런데 새들 중에 자신의 집(둥지)을 만들지 못하고 딱따구리가 나무 중간에 파놓은 안락한 곳을 노리는 요상한 부류가 있다. 몇달동안 부리로 쪼아 만든 그 공간을 틈만 나면 공략하여 무단점거를 하는 것이다. 집을 빼앗기고 허둥대는 딱따구리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남이 다 지어놓은 집을 내 집인양 차지하고 앉아 새끼를 낳는 새의 모습에서 인간의 군상을 엿본다. 땀을 흘려 애써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여 집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편법으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며 약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인간들이 세상에는 많기도 많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어떤 집에 사느냐보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이냐?’가 더 비중이 크다. 인생이라는 집보다 사는 주체가 더 소중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채 그냥 산다. 대충 남이 하는대로 하면서 산다. 남의 집터에 자기 집을 짓는 격이다. 인생의 주제도 없다. 자기가 이 땅에 왜 왔는지를 모른다. 그냥 잘 먹고 잘 자면 잘 사는 줄 안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면 그게 자기를 아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물론 잘먹고 안락하게 살면 육신은 편안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으로 안된다. 영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혼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 안에 있지만 지배를 받지도 않는다.
다들 열심히는 산다. 그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보면 사는 것이 다 그렇고 그렇다. 자기 성장 계획서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설계도가 있다고 해도 남의 것을 가져다가 짓고 있다. 소재도 바꾸지 않고 주위는 둘러보지도 않고 자기 것이 제일인 양 착각하며 살아왔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고 좋은 자재들이 쏟아지는데 말이다. 인생은 집을 짓는 것이다. 지금 그 집이 COVID-19로 흔들리고 있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이겨내야만 한다. 잘 짓고 잘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