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을때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스쳐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 나가는 청춘은 힘겹고 모든 것이 낯설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실수하지만 멈출 수도 없다. 학업, 이후의 취업. 그리고 인륜지대사 결혼. 이후에는 더 높은곳을 향해 가슴을 넓혀야 한다. 어쩌다 넘어지면 죽을 것 같다. ‘내가 이것 밖에 안되나?’ 파고드는 자괴감에 힘겨워 한다. 젊음이 재산이라 생각하고 버텨낸다. 그런데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대견해 하다가 어느새 더해진 내 나이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받은 은총은 마주치는 그 무언가에 대해 오버하지 않게 된 사실이다.
온몸이 떨릴 정도의 흥분감은 감소되지만 좋은 일에도 겸손할 줄 알고, 안 좋은 일을 만나도 의연히 대처하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새옹지마(塞翁之馬)가 실감난다. 좋은 일에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뿌리채 흔들리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며 ‘아, 이거였구나!’ 인생 선배들이 미리 걸었던 과정을 초연하게 받아들여 본다. 나이의 숫자가 더해가며 느끼는 것은 세월의 속도이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날아간다. 하루를 시작하면 저녁이고, 월요일을 지나고 나면 어느새 주말이다. 새해가 밝았다고 가슴이 들떴는데 이제 한해의 마지막 달이 손짓을 한다.
젊었을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삶이 한순간 돌아보니 그렇게 짧을수가 없다. 아련한 추억이 손에 잡힐 듯한데 헤아려보니 수십년전의 일이다. 우리 시대에도 스타는 있었다.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탤런트부터 영화배우. 코메디언, 올림픽 영웅, 유명 정치인. 한 시대를 풍미한 그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소식을 듣는다. 어려운 시대에도 그들 때문에 행복했고, 웃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어떤 분은 스타답게 멋지게 생을 마감하는가하면 떠나가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운 분도 있다. 그렇게 한세상을 열심히 살다가 하나둘 떠나가는가보다.
살아보니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더라.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을 잠시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세 안정을 찾으며 오히려 자신이 더 행복한 사람인 것을 자각하며 살아간다. 누구나 호기심이 있기에 극관심을 보이다가도 그 차원을 넘어가지는 않는 것을 본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순경이기에 자주 전근을 다녀야 했고, 따라서 친구를 깊이 사귈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어디서나 과장해서 나를 나타내 보여야 했다. 장애인만이 가진 숨겨진 열등감이랄까?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아이들을 능가하려고 애를 썼다. 그만큼 장애를 가진 소년의 가슴은 항상 아팠다.
며칠 전, 만난 분이 자녀들이 아내에게 명품가방을 사주어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명품하나 없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얘기를 전해 들으며 미소만 짓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원인 모를 무력감이 올라왔다. 각자 취향이 다르겠지만 명품을 지니고 다녀야 행복할까? 차는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잘 굴러가면 되고, 시계는 핸드폰에 가장 정확하게 장착되어 있고, 옷은 가장 편하고 잘 어울리는 것을 걸치면 되는 것 아닐까? 굳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의 명품을 소유하려는 인생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인생의 달인이 된 것일까? 가질 수 없기에 어기장을 놓는 것일까?
인생을 살아보니 남들의 가치 기준에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된다. 비교의식에 시달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얼마나 시간낭비이고 미성숙함인 모습인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내용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을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을 쌓아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고귀함을 깨닫는다. 인생을 살아보니 남에게 베푸는 친절과 사랑은 결코 밑지는 적이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아차리고 있는 중이다. 결국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