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가면 그리움의 온도는 올라간다

by 관리자 posted Nov 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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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png

 

 가을이 깊어간다. 어느새 겨울의 반갑지 않은 입김이 서서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서부에 살 때에는 한결같은 청명한 날씨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동부는 그런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계절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 흩날리는 가을 낙엽 속에서 불현 듯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시대의 어머니가 다 그러했듯이 우리 어머니도 꽤나 억척스럽게 사셨다.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시던 모습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들의 다리를 고쳐보겠다.”고 전국을 수소문해 ‘용하다’는 의원들에게 나를 많이도 데리고 다니셨다. 그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럽다. 갑자기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누군가는 그랬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평생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응어리진 가슴을 보듬으며 사는 것이 인생인가보다. 이산가족들을 생각해 본다. 어느 날, 공산치하를 벗어나려 정든 고향을 떠나며 “잠시 피난을 갔다 오면 되겠지.”했는데 그 세월이 60여년이다. 그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신혼의 단꿈을 포기한 채, 나이든 노모를 뒤로하고, 어리디 어린 딸에게 “예쁜 꽃신을 사가지고 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군대에 끌려가며 “금방 오리라.”고. 손을 흔들며 떠난 사람들. 가로막힌 휴전선은 그들의 그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지부동 서있고, 만남의 기약은 아직도 요원하다.

 

 나는 인사이동이 잦은 경찰 아버지를 둔 까닭에 초등학교를 다섯 군데나 다녀야 했고 정들었던 친구들과 자주 이별을 해야만 하였다. 낯선 학교와 환경에서 서먹한 분위기를 삭히며 쉬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 구석에 숨어 그리운 친구들의 이름을 땅위에 적어댔다. 정말 보고 싶었다. 고교시절,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여 꿈에 그리던 서울생활을 하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가세(家勢)가 기울어지며 엄마와 헤어져 살아야 하는 세월이 있었다. 전화도 없던 시절에 엄마를 부르며 울먹이던 사춘기 내 모습이 저만치 투영되어 다가온다.

 

 신앙의 싹을 틔우며 자라난 “홍릉교회”(청량리)에서 소명을 받고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담임 목사님은 물론이고 많은 성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총신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 전도사로 임명되었고 온힘을 다해 주일학교를 섬겼다. 그렇게 영원히 머무를 줄 알았는데 정들었던 본 교회를 떠나는 순간이 다가왔다. 보다 장성한 목회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본 교회를 떠난 후 밀려오는 그리움을 견뎌내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예배시간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강단을 바라보던 아이들, 함께 했던 교사들, 교회 형, 누나들. 그리고 후배들이 그리워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결혼을 하자마자 “강도사 고시”를 치러야만 하였다. 목사가 되는 과정에서 이 고시는 꼭 넘어야할 커다란 관문이었다. 짐을 싸서 떠나야 했다. 신혼에 홀로 “광주기도원”(경기도)에 올라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몰두하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어느 날 밤, 고시공부를 하다가 잠시 바람을 쐐기위해 밖으로 나왔다. 보름이어서인지 휘영청 둥근달이 떠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달을 보고 아내가 보고 싶어 울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로스앤젤레스’로 늦깎이 이민을 왔다. 갑작스런 장애인선교의 소명을 받고 미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아직 어리디 어린 아이들, 가녀린 아내. 언어도 지리도 어둡고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여건 속에서 이민의 삶은 시작되었다. 다행히 밀알선교단에 involve 되었고, 본격적인 장애인사역에 몰두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현 듯 다가온 ‘향수병’은 또다시 넘어가야 하는 과정이었다. 아마 그때처럼 한국드라마에 몰두한 적도 드문 것 같다. 영상에 비춰지는 서울거리를 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어느 정도 달랬던 것 같다.

 

 나는 철이 없어서인지, 외아들이라서 그랬는지 평생 “엄마”라고 불렀다. “어머니”하면 거리가 느껴져서일까? 차창에 날아와 붙는 단풍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엄마, 잘 계시지요? 많이 보고 싶습니다.” ‘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가면 그리움의 온도는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