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성패는 단순한 것에서 갈라진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성공을 쟁취하고야 만다. 45년 전에 밀알선교단을 창립한 이재서 박사도 그런 인물이다. 그는 건강하게 태어나 여느 아이들처럼 꿈을 꾸며 뛰어 놀았다. 그가 15살이 되던 어느 봄날, 그의 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병은 점점 깊어져 결국 멀쩡하던 두 눈의 시력이 닫히면서 시각장애인이 되고 만다.
드넓은 벌판을 마음껏 활보하던 이재서는 졸지에 방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시각장애인이 되어 캄캄한 암흑 속에서 울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가 거기서 포기했다면 오늘의 “밀알선교단” 태동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이재서는 번민의 세월을 견뎌내고 재기의 길을 찾는다. 한국 맹학교에 입학하여 점자를 배우고 친구들보다 늦은 나이에 향학열을 불태운다. 1973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초청 전도대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의 생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동료들과 기도 끝에 1979년 10월 16일 밀알선교단을 창립하고, 나중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필라델피아 밀알선교단”을 세운 후 “미주 밀알과 세계 밀알”을 개척해 나아간다. 그의 자서전을 읽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지을 정도로 집념의 길을 걸어 온 것에 감탄을 하게 된다.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사람들은 “포기”라는 단어 앞에서 흔들리는 시간을 갖게 된다. 직장생활이 힘들고 사업이 어렵다고 포기하면 “실업자”가 된다. 군대 생활이 힘들다고 포기하면 “탈영병”이 된다.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포기하면 “이혼남(녀)”가 된다. 어찌보면 “포기”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인생의 과제인지 모른다.
“ 김익진”. 봄이 다가오는 4월 중순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1주일간의 사투를 벌인 후에야 그는 태어났다. 의사들은 “이 아이는 1년 안에 죽는다.”는 절망적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재활치료에 대한 끈기로 일어선다.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있지만 그는 아주 활기차고 진취적인 사고로 살고 있다. 어머니는 익진이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의 눈물은 강을 이루었다.
고교시절, 그에게 ‘용기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우쳐준 사건이 일어난다. 제주도 수학여행에서의 일이다. 일정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는 수학여행을 포기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의 설득으로 익진은 수학여행 길에 오른다. 일정표를 확인하는 도중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성산일출봉 등반”이라는 글자였다. 그는 지금까지 산을 올라본 일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제주도 공항에 도착한 후 수학여행 일정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고, 여행 셋째 날이 다가왔다. 오늘은 예정대로 “성산 일출봉”을 등반하는 날이었다. 등산은 그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코스이다. 결국 단체사진만 찍고 일행을 차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때 익진의 뇌리에 생명처럼 여기는 좌우명이 스쳐 지나갔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
망설이는 그에게 다가온 친구들이 “익진아! 우리가 도울게” 외쳤다.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친구들은 지친 그를 업고 10분 간격으로 정상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계속하였다. 정상을 저만치 두고 익진은 스스로 걷기를 결심한다. 드디어 정상에 섰을 때 선생님들과 학우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반겨주었다.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익진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장애 때문에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워버렸다. 성산일출봉 정상 인증샷을 하면서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고 그는 몇 번인가를 되뇌었다. 그렇다. 힘들다고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삶이 너무도 황홀하지 않은가! “절대 포기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