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가 입장합니다. 하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례자의 멘트에 따라 저만치 다가오는 사랑하는 딸의 모습이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딸의 오른손을 잡고 예식장을 걸어 들어간다. “신랑 입장”의 구호에 따라 예식장에 들어서던 때가 31년 전인데 세월은 흘러 이제 딸을 신랑에게 인도하기 위해 걸어들어 가고 있다. 언제까지나 귀엽고 앳된 모습으로 머물기를 바랐건만 아이는 자라 아내에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 후배 목사의 고백이 떠오른다. “해리스버그에 있는 <Penn State Uni.>에 딸을 데려다 주고, 오면서 울고 아내와 한 달을 울며 지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결혼 소식에 접한 사람들은 “축하한다.”는 말끝에 농담을 던진다. “목사님, 그렇게 예쁜 딸을 아까워서 어떻게 시집보내세요?” 결혼 리허설 때 까지는 전혀 감정의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신부 입장”을 하는 이 시간 ‘울컥’하며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신랑의 성이 “이 氏”라는 사실이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내 마음에 불현 듯 생각이 스쳐갔다. ‘신부 입장을 아빠가 시켜야 하는데 내 걸음걸이가 온전치 못해 딸에게 누(累)가 되지 않을까?’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그냥 흘러내리던 눈물은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스스로 놀랐다. ‘당당하던 내안에 이런 두려움이 숨어있었다.’니? 그때부터 생각이 복잡해 졌다. ‘차라리 신랑 · 신부 동시입장’을 할까?’ 아내에게 의견을 물으니 그렇게 하란다. 은근히 서운했다. 이내 원래 방법으로 생각을 굳혔다.
결혼을 사흘 앞두고 아내와 단둘이 식사를 하다가 물었다. “Honey!(나는 아내를 그렇게 부른다) ‘인애’ 시집가는데 서운하지 않아?” 아내가 고개를 돌린다. 두 뺨에 눈물이 흥건했다. 이미 울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예비사위가 가져다 준 ‘홍삼액’을 따서 내밀었다. “힘을 내요. 다 가는 건데. 우리가 약해지면 안 되지.” 그러면서 내 목소리도 잠겨갔다. 이 땅에 딸을 가진 부모들은 이런 묘한 감정을 넘어서야만 하는 것 같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밝았다. 전날까지 그리 좋던 하늘은 촉촉한 봄비를 뿜어낸다. 딸의 친구 미용사가 집에 도착하자 분주해 졌다. 식구들이 돌아가며 단장을 하고 나도 준비했던 새 양복을 꺼내 입고 몸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딸이 드레스를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아름답다. 내 딸이라 그런 걸까? 평소에는 그렇게 정겹던 봄비가 오늘은 왜 이리 얄미운지? 그 비를 헤치고 축하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다른 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얼마나 소중하고 고맙던지!
결혼식은 순조롭고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주례 목사님은 시종 윗트와 섬세한 감각으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드디어 축가를 부르는 시간. 특이하게 양가 바깥사돈들이 축가를 불렀다. “축복의 노래”를 열창했고 반응은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어 인사말을 하기 위해 단에 섰다. 그렇게 결심을 했건만 절제하기 힘들 정도로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장애를 가진 저에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다가온 두려움은 첫째, ‘나도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둘째는, ‘나도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셋째는, ‘나도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 고비를 넘어설 때 마다 기도했고,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분위기는 숙연해졌지만 감동이 잔잔하게 번져갔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딸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어미 새가 둥지에 알을 낳아놓으면 깨어나 자라나고 날아가듯이 자녀들은 장성하면 짝을 만나 둥지를 떠난다. 서운하지만 이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부모들의 일치된 소망이기도 하다. 그 과정이 부모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 속에 인생의 희락을 경험하며 나이를 먹는다.
“딸아! 잘 살아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오늘도 부모들은 자식의 앞날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