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를 사랑하니?”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남편은 가끔 섭섭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사랑하지. 아니면 왜 같이 살겠어?” 남편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같이 산다고 사랑하는 건가?” 나도 남편에게 섭섭함이 밀려올 때면 같은 질문을 했다. 남편의 대답은 매번 같았다. “자기 나 사랑해?” “으∼응∼” 이런 식이다. 나 역시 양이 차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부부가 사랑 타령을 시작한 건 아이가 생긴 뒤부터다. “연애는 장난, 신혼은 소꿉놀이였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이의 탄생으로 부부 갈등, 고부 갈등의 진면목을 경험하며, 상대를 물어뜯었고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너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더 ‘조근 조근’했는데….” 남편이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이가 태어난 이후였다. 나는 갈등 사안이 생겼을 때 예전보다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면 나의 현실이 다음 세대에서도 이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출산 이후 인터넷에서 본 한 여성 네티즌의 자조가 절절하게 와 닿았다. “아내와 며느리는 하녀다.”라는 말이었다. 나를 하녀 취급한 사람은 없지만 요구 수준이 그러했다. 일과 육아에 남편 내조까지…. 대놓고 이 역할을 내 몫으로 규정한 사람은 없었다. 은근한 세뇌로 어깨에 부담을 얹어놓고는 했다.
어느 부부의 적나라한 삶의 모습이다. 나의 친구는 고교시절에 만나 7년을 교제하다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그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이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부부싸움은 처절했다. 친구는 7남매의 막내이고, 아내는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었다.(3녀 중)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던 부부는 견디기 힘든 갈등을 겪으며 가정생활을 이어갔다. 결혼 전과 그 후. 연애와 결혼은 판이하게 다르다. 대개 연애는 “로맨스와 위안”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말 마음이 편안했어요.” 그런 설레임으로 사랑은 시작된다. 연인들은 그 관계가 연장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결혼을 한다. 사실 남녀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호감이다.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질 때에 사랑이 싹튼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만남을 통해 기대감이 증폭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감소하는 경우가 많다. 해서 연애 기간이 그리 길어지기가 어렵다. 연애와 결혼이 다르다는 것은 연애시절에는 좋은 것만 보여 주려하고 보게 되지만 결혼은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연애를 통해 상대방을 알만치 알았다고 생각하고 젊은이들은 결혼을 강행한다. ‘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가정을 이룬다.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몇 개월 아니 신혼여행부터 현실은 냉혹하게 다가온다. ‘아니 뭐야? 이건 개털이잖아.’ 탄식이 나온다. 우리 어머니들은 그래도 참았다. 하지만 요사이 젊은 아낙은 다르다. 투쟁 아니면 결별이다.
지난 5월. 서부에 살고 있는 고교 선배로부터 내 딸 ‘결혼을 축하한다.’는 카드와 함께 거금의 축하금이 답지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전화버튼을 눌렀다. 이야기 끝에 2년 전에 결혼한 선배 딸의 안부를 물었다. 머뭇거리면서 “그냥 그렇게 됐어”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는 직설적이다. “아니, 이혼했어요?” “응, 지금 집에 와있어” 탄식이 나왔다. 꼭 결혼생활 1년 반 만에 일이다. 결혼의 덕목은 ‘참음’이다.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사이는 그것을 사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저기서 창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사랑은 고백으로 설레임의 파도를 일으킨다. 결혼은 그 설레임이 행동을 수반해야만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없이는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 “당신 나 사랑하기는 해?”라는 질문에는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반감이 숨어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결코 유행가 가사가 아님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