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는가보다 했는데 한낮에 내리쬐는 햇살의 농도는 아직도 여름을 닮았다. 금년은 윤달이 끼어서인지 가을이 더디 오는 듯하다. 따스한 기온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을 정취에 흠뻑 취하고 싶어 하는 감성적인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방해가 되는 것 같다. 나는 감성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워낙 걸음걸이가 느려서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빨리 걷지 못하는 약점이 감성으로 나를 몰아간 것 같다. 항상 천천히 그리고 쉬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음미하던 습성이 풍부한 감성을 소유하게 만들었다.
감성욕구를 채우기 위해 총각시절에는 일주일에 한번 영화 한편을 보아야했고 야구장을 찾았다. 음악회나 미술관을 둘러보는 일도 일상이었다. 특히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연말여행을 떠났다. 겨울바다를 그래서 자주 찾았고 아무 생각 없이 한해의 삶의 찌꺼기를 걸러내고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새해 사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결혼을 하며 그 모든 것은 접어야만했다. 일단 아내와 나는 취향이 일치하지 않았고, 담임목회는 나에게 감성을 추구할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감성보다는 현실적응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했다.
지금도 가을이 오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이 치고 올라온다. 그럴 때 찾아가는 곳이 "New Hope"이다. 낭만적인 목조다리를 건너가면 오른편에 자그마한 카페가 드리워있다. 창 쪽 테이블을 마주하고 진한 향에 커피를 마신다. 다양한 피부의 사람들이 오고가고 그들의 표정에서 계절의 움직임을 읽는다. 금년에는 단풍이 늦게 찾아오는 듯하다. 각양각색의 단풍이 눈처럼 날리는 숲속을 달리고 싶다. 감미로운 음악을 틀어놓고 질주하며 가을에 취하고 싶다. 필라의 가을은 그래서 정겹고 푸근하다.
그런데 문제는 삶은 감성이 안 통한다는 것이다. 공부를 해도, 사업을 해도, 회사업무를 감당해도 이지적이어야 한다. 간혹 사업을 해서는 안 될 사람이 손을 대었다가 낭패를 당하는 모습을 본다. 비즈니스 마인드가 없는 사람은 절대 사업에 손을 대면 안 된다. 그런데 당뇨환자가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라면, 자장면’이 자꾸 땡기듯이 은사가 없는 사람이 사업에 집착하는 희한한 장면을 목격한다. 감성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사업이다. 지나치게 표현하면 현실은 냉혹하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만이 사업을 경영할 수 있다.
왜 연예인들에게 결혼파탄이 쉽게 찾아올까? 감성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감성의 산출이다. 다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 연애감정을 평생 유지할 수 있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아니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결혼 1년차는 남자는 말하고 여자는 듣는다. 결혼 2년차가 되면 여자가 말하고 남자가 듣는다. 결혼이 3년차에 접어들면 둘 다 말하고 이웃이 들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낭만, 애틋, 그윽한 눈빛, 안보이면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하는 부부는 소설에나 등장하는 픽션이다. 따라서 감성적인 사람은 결혼생활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언젠가 막차를 탄 듯한 부부를 상담했다. 아내는 음악전공자이고, 남편은 건실한 직장인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컴맹이던 아내가 자판에 익숙해지더니(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 금방 익힘) 채팅으로 한 남자를 만났다. 가슴이 ‘뻥’ 뚫리는 대화가 너무 좋았다. 결국 감성이 풍부한 그 남자에게 가고 싶어 했다. 상황을 직시하도록 논리를 펴며 설득해 보아도 그 여인은 전혀 요동하지 않았다. 들리는 이야기가 결국 남남이 되었단다.
감성론자들은 고뇌하며 오늘도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에 머리는 차게 가슴은 뜨겁게 창조하셨다. 냉정한 이성은 현실감각을 발달시킨다. 하지만 때로는 잡히지 않지만 다가오는 무언가에 손을 내어밀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감성과 현실의 골은 너무도 깊다. 틈바구니에서 고뇌하는 그대를 위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