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공항에 대한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공항 대합실” “공항에 부는 바람” “공항의 이별” 가수 ‘문주란’은 굵고 특이하면서도 구성진 창법으로 연속 히트를 쳤다. 그때만 해도 특권층만이 국제 여행을 하던 때라, 공항에 대한 노래를 부르면서 사람들은 신비에 쌓인 세계 여행에 대한 동경을 달랬던 것 같다. 70년대 후반, 내가 자라난 “홍릉교회” 담임 목사님이 미국에 가시게 되었다. ‘때는 이때다’ 싶어 환송도 하고, 공항 구경도 할 겸 성도들 틈에 끼어 공항 가는 교회버스에 자리를 잡았다.
어림잡아 50여명은 되는 듯한 성도들이 둘러서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다보니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저만치서도 누군가를 가운데 세워놓고 예배를 드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 왔다. 짧게나 할 것이지, 30분 이상을 그렇게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은 둘러선 성도들과 악수례를 하고 검색대를 통과 해 들어 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일이지만 그때는 누가 외국에 간다하면 다들 공항에 나가 거창한(?) 환송 예식을 거행했다. 버스 대합실, 혹은 기차역에서 오고가는 것과는 색다른 모습이 연출되는 것은 공항은 하늘을 날아 멀리 오고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인, 장모님이 미국에 처음 오시던 생각이 떠오른다. 오시기 전날, 아내는 내 귀에 속삭였다. “내일 우리 엄마 온다!” 그날 밤 아내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드디어 당일, 우리는 서둘러 뉴욕 J.F.K.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당도 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한 것 보다는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두 분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셨다. 얼마나 반갑던지. 미국식으로 ‘허그’를 하고 준비해간 꽃다발을 안겨 드렸다.
그렇게 두 분은 필라에 오셨고, 한 달을 머무셨다. 모처럼 미국에 오신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랭커스터로, 워싱톤으로, 마지막에는 뉴욕까지 관광을 시켜드리느라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 두 분의 신기 해 하는 모습에 피곤한 줄 모르고 귀한 시간을 함께했다. 몇 개월 머무시기를 원했지만 한국에 경영하시는 농장일 때문에 두 분은 한 달이 채 못 되어 한국으로 가시게 되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이제는 두 분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에 차안에는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짐을 부치고, 두 분이 검색대를 향해 들어가신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위인 내가 인사를 하고, 아내가 장모를 안고 인사를 한다. “엄마! 잘 가요!” 이내 아내의 뺨에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따라간 막내딸도 두 눈이 붉어져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다. 저만치 두 분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두 손을 흔들었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을 빠져 나와 주차장을 향해 가며 뭔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주차장에 다가갔을 때 옆 차에 타려는 동양인 자매도 울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정든 누군가를 떠나보냈으리라!
차가 출발하고 세 사람은 창밖을 응시한 채 흐느끼고 있었다. 사람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이리도 서러운 것일까? 저만치 떠오르는 비행기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내 드리지만 언젠가는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오고야 말겠지?” 지난 주간, 집회 인도 차 서부를 다녀왔다. 두 주간 동안 함께 다니며 말씀을 증거하고 담임 목사와 정을 쌓았다. 간간히 명소도 방문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리고 헤어지는 순간. 공항에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은 이별의 아쉬움을 아는 듯 옷깃을 파고들었다. 아쉬움에 마주 잡은 손을 쉽게 놓지 못한다. 만남과 헤어짐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곳이 공항인 것 같다.
손님을 맞이할 때는 한없이 반갑고 행복하지만 떠나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일은 너무도 아프다. 그래서 인생은 서러운가 보다. 오늘도 공항에는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교차하며 분주하게 비행기가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와주어 반갑고, 가주어 더 반갑다.”는 미묘한 전설이 교차하는 곳도 공항이다. 오늘도 공항에서는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환호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범벅이 되어 인생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