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말을 해야 사는 존재이다. “언어가 통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아무리 재미있는 ‘조크’도 알아듣지 못하면 전혀 효과가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따라서 한국말을 쓴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한국말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타국어와 다른 자존심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강대국의 침범을 많이도 받아왔다. 언어가 순수성을 간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환경이었다.
급기야 일제 36년의 학정 속에 창씨개명을 해야 하고, 한국말을 써서는 안 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역경을 이기고 우리말은 고고한 자존심을 지켜왔다. 중국의 예를 들면, 중국은 소수 민족이 합쳐져 거대한 나라가 되었다. 역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그중에 55개 소수 민족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언어가 본토에 살고 있던 한족(漢族)에게 동화되어 버린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유독히 조선족만은 한국말을 쓰며 한국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4년 전, 중국 연변에 가서 상점 간판 곳곳에 한글이 새겨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필자는 한글학자가 아니다.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이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며 평소에 느꼈던 점을 적어보고자 한다. 우리 언어에서 독특한 점은 「겹치는 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쓰여 지고 있다. 우리는 “동해”를 이야기 할 때 꼭 “동해 바다”라고 한다. “태평양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처가(妻家)”하면 될 것을 “처갓집” 한다. “역전(驛前)”하면 되는데 “역전 앞”한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족발”은 풀어쓰면 “발발”이 된다. 족(足)이 이미 발 족字니까.
“모찌 떡”, “황토 흙” “깡통”도 그렇고, 야구 해설을 하는 것을 보면 “공이 Line 선상(線上)을 타고 갔다”고 한다. ‘박수를 친다.’는 말도 희한하다. 박수의 ‘박’은 ‘칠 박(拍)’자이다. 이미 그 안에 뜻이 들어 있음에도 대통령도, 대학교수도, 아나운서도,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도 “박수를 치자”라고 말한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명언도 있다. 국문학자들은 이것은 틀린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더 가까이 접근하자, “철새들이 사는 서식지” “가난한 빈촌” “깊은 산골 오지” “값싸고 저렴한 물건”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낸다.” “알은 곧 어린 치어가 될 것이다” “주어진 조건이나 여건에 맞추어 살자” “지금 새 신부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열기를 감지하였다” “상호 명을 적어 놓았다” “부엌에서 쓰는 주방용품” “봄의 향기가 나는 채소나 나물” “누누이 여러 번 말씀드렸다” “기쁨과 환희에 넘쳤다” “기쁜 경사를 앞두고” “지나친 과찬입니다” “일목요연하게 한 눈에 훤히 알아볼 수 있다” “만류하거나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우리나라말은 90%가 한자(漢字)라고 한다. 그 한자와 순수한 한글을 함께 쓰려는 눈물 어린 노력이 이런 독특한 언어를 창출 해낸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적(情的)인 면이 강하다. 밥을 줄때도 절대 한 숟가락만은 안준다. “정 떨어진대!”하며 꼭 한두 숟가락을 더 퍼준다. 헤어질 때 우리 민족처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다. 한번 인사를 했으면 되었건만 같은 인사를 되풀이 하면서 시간이 길어진다. 겹치는 말을 많이 쓰게 된 이유는 그 만큼 상대방을 챙기는 정(情)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서 대표 기도를 할 때도 문단이 끝날 때마다 “원하옵고 바라옵나이다.”하시는 분이 있다. “거룩한 성호(聖呼)를 찬양합시다.”라고 자연스럽게 외친다. 호남 사투리 중에 “버려 버려!”하는 말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이하다. 그런데 그 말들을 가만히 되뇌어보면 그 안에 우리 민족 만에 자존심이 깔려 있는 것을 본다. 우리 민족은 언어에 대한 자존심만은 꿋꿋하게 지켜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오늘도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하면서 민족정기를 이어가고 있다.
서로를 챙겨주는 정감 어린 마음으로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며 우리들만의 자존심을 언어로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그 우직함이 이민의 삶을 견고히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