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현실

by 관리자 posted Jan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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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용.jpg

 

  고교시절 가슴을 달뜨게 한 노래들이 멋진 사랑에 대한 로망을 품게 했다. 70년대 포크송이 트로트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며 가요판세를 흔들었다. 템포가 그리 빠르지 않으면서도 서정적인 가사는 청춘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통기타, 생맥주, 청바지로 통칭되는 청년문화는 그래서 창출되었다. 모이면 그리 부담이 덜한 생맥주로 목을 축이고, 통기타와 함께 노래를 불러대면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지내놓고 보니 암울한 시대였다. 군부독재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으며 폭주를 계속하고, 머리조차 마음대로 기를 수 없도록 단속을 해댔고, 대중이 즐겨야 할 노래까지 선별하며 길들이려했다. 그 와중에도 젊음 가슴은 거칠 것 없이 달려 나갔다. 그래서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자랑스럽다.

 

  당시 최고 히트송은 가수 이종용의 였다. “낙엽지는 그 숲속에 파란 바닷가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별빛같은 눈망울로 영원을 약속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던 너로 시작되는 노래는 당시 흔한 포크송의 패턴을 벗어난 듯하면서도 단순한 리듬으로 대중에게 익숙하게 다가갔다. 기타 아르페지오 주법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빠른 템포의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음반시장을 점령하며 대히트를 쳤다. 한동안 승승장구하던 이종용은 대마초 흡입사건에 휘말리며 자취를 감추었다.

 

  잊혀졌는가 했던 그의 근황을 미국에 이민을 오며 알게 되었다. L.A. 코너스톤 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에 매진하는 그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그를 만나지 못하다가 필라델피아에서 그와 정면으로 만남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절친한 친구목사 교회에서 교회창립기념 성회에 이종용 목사를 강사로 초청한 것이다. “집회 첫날 헌금 특송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집회 전 저녁을 함께하기 위해 일식집에 들어섰다. 애창하며 즐겨듣던 노래 의 주인공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설레이게 하던지. 마주친 이종용은 그 옛날 무대에서 노래하던 가수가 아니었다. 중후한 목회자, 온유하고 겸손한 인상의 이 목사는 팬입니다.”하며 다가가는 내 손을 온화한 미소로 맞잡아 주었다.

 

  그의 설교는 무엇보다 열정이 넘쳤다. 주님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성도들을 신앙으로 온전히 세우고자하는 안타까움이 강단에서 우러나왔다. 영성 넘치는 설교를 통해 분위기는 고조되며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그의 간증에서 당황스러운 발언이 튀어나왔다. “성도님들, 제가 처음 가요계에 데뷔한 노래는 입니다. 그런데요. 저는 그냥 곡을 받아 노래를 했을 뿐입니다. 저는 낙엽 지는 숲속에 가본적도 없구요. 파란 바닷가에서 어떤 여자의 손을 잡아 본적도 없을 뿐 아니라 별빛 같은 눈망울의 여자를 마주한 적도 없습니다.” 대 실망이었다. 기타를 치며 를 부를 때 마다 상상했던 로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종용은 가사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이 그냥 노래를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아하, 예술은 예술이구나! 가수 김광석을 기억하는가?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한 그는 진정 천재 가수이다. 그의 노랫말 하나하나가 옥구슬처럼 심정을 울린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그의 노래 중에 이등병의 편지가 있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포기 친구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군대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당시는 고생스러웠던 그 시절을 회고하며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하는 노래이다. 입대를 앞둔 입영대상자에게는 가슴을 절절히 파고드는 노랫말이다. 그런데 정작 김광석은 방위근무를 했다. 하니까 그에게는 그런 애절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심취하는 노래, 드라마, 영화, 소설, 희곡은 대부분 픽션(fiction)이다.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내는 행위를 말한다. 반면 현실은 냉혹하다. 그래서 삶은 외롭고 힘든지도 모른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