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차피 외로운 것이라고 들 한다. 그 외로움이 때로는 삶을 어두운 데로 끌고 가지만 외롭기에 거기에서 시가 나오고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오는 것 같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외로움이 두렵다기보다 그 상황을 더 무서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결국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외로움은 평생 걸머지고 가야하는 숙제인 것 같다. 사람들은 술을 즐긴다.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술이 안겨주는 한잔의 몽롱함은 그 농도를 더해가면서 더 깊은 외로움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내가 외롭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 항상 호탕하게 웃으며 밝은 인상을 지키는 모습은 외로움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외롭게 살았고 여전히 외로움과 동행하고 있다. 나의 고교시절은 너무도 혼란한 시기였다. 그렇게 튼튼하던 우리 가정에 경제파탄이 치고 들어왔고 그로인한 아버지의 조기은퇴는 우리 가정을 가혹한 현실로 몰아갔다. 날마다 빚쟁이들이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하고 아예 안방에 드러누워 “내 돈을 내어 놓으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 당시 나는 지옥을 목격했다.
사람이 독이 오르면 얼마나 악한 모습이 나타나는지, 금전적 손해 앞에 그토록 점잖던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언행을 내뱉으며 흐트러지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우체국장은 내가 작은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나를 아끼고 사랑했었다. 하지만 일단 채권자가 되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아버지를 깎아 세우고 나를 조롱했다. 사랑의 온상 같았던 우리 가정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났다. 경제사범이 된 어머니는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어머니가 어디에 갔느냐?”고 다그치는 나에게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당시 나는 KSCF 서울 연맹 회장을 하며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사춘기 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내버렸다. 여름 방학에 대구에서 전국대회가 열렸다. 전화가 없던 시절에 나는 대구연맹 한 학년 아래인 소녀와 펜팔로 교감하고 있었다. 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던 와중에 우리는 외진 교실에서 1년 만에 재회를 했다. 수척해진 내 얼굴에 그 애의 고운손이 다가왔다. “마이 힘드른나? 얼굴이 영 아이네! 힘내라”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아이의 대구 말씨와 터치가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글을 쓰다가 불현 듯 어느 하늘아래 살고 있을 그 아이가 생각났다.
고교시절부터 명동을 휩쓸고 다니며 추억을 쌓았던 친구 성원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졸업을 하자마자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강주와 셋이서 그렇게 뒹굴며 우정을 쌓았는데 너무도 서운했다. 수많은 이별을 했지만 성원이와의 이별은 가슴이 시리도록 슬펐다. 성원을 떠나보내고 강주와 나는 술을 마실 때마다 성원이 자리에 술잔을 채우고 얼마나 넋두리를 해댔는지 모른다. 3년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큰 아픔이었다. 후에 들리는 소문에 목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수소문해 보아도 성원이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젊은 날 방황하던 나에게 주님이 다가오셨다. 오로지 노래, 기타, 부딪치는 술잔으로 외로움의 그림자를 떨쳐 보내려 애쓰던 그 자리에 그분이 조용히 손을 내어 미셨다. 그분을 만나고 받은 은총은 근본적인 외로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슴 한켠에 스며드는 외로움은 살아있기에 겪어야 할 숙제인 것 같다. 누구나 동감하듯 나이가 들어 친구를 만나는 것은 쉬어보이지 않는다. 순수성이 결여되고 이미 사고가 굳어버린 상태에서 진정한 교감은 불가능해 보인다.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옛 노래를 부르다 지쳐버리고. 참 인생이 애달프다.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을 당한 그때부터 인생은 외로움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존재인 것 같다. 세상 것이 많아서, 모든 것이 부요하다고, 주위에 사람들이 많다고. 그 녀석이 쉽게 물러가진 않을 것 같다. 외로운 사람끼리 보듬어 주며 한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가을은 외로움을 몰고 오는 계절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