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젊은 목사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고 사역에 대한 의욕이 충만했다. 건의하는 횟수와 강도는 점점 늘어갔다. 하루는 나에게 담임목사님이 말했다. “이 목사님, 뭘 그렇게 자꾸 하려고 하세요. 조금 천천히 갑시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세월의 속도가 붙으며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열정이 점점 식어간다. 일을 끌고 다니던 내가 이제는 은근히 압도당하는 듯 한 무게감에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행사를 할 때마다 뛰어대던 심장도 잠잠하고 설레이던 마음도 언제부터인가 일렁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현실안주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 같다.
중후한 외모의 노인과 마주앉았다.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와 정중한 말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직업이 의사였다. 연세를 물으니 금년 65세라고 했다. 아무리보아도 더들어 보여 고개를 갸우뚱했다. 농담을 한 것이다. 내 반응에 “목사님 사실 나는 나이가 많습니다. 제가 35년생입니다.” 그럼 83세? 놀랐다. 그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강의 비결을 물었다. “예, 아직 저는 현역입니다. 매일 출근하여 환자를 봅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아내와 골프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모든 면에 활동을 놓지 않는 그분은 아주 정정해 보였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이 나이에 뭘?” 그것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놓는다. 나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숫자에 눌려 살아서는 안 된다. 나이든 청년이 있고 젊어도 늙은 청년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생을 재출발하는 데 있어서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금융 자본가인 J.P.모건이 실제로 재출발한 것은 60세를 지나서였다. 링컨 대통령은 50세를 지나기까지 대통령에 적합한 인재가 되어있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시행착오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이가 들면 순발력이 떨어질 수는 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올바른 출발을 하는 데에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단독으로 목회를 하게 된 것은 43세 때였다. 구두 수선공 출신으로 뱅갈어를 비롯하여 40개 국어로 성서를 번역한 윌리엄 케리는 40세부터 번역작업을 시작했다. 영적 생활의 시작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20대, 30대를 생각해 보자. 실로 일과 사랑에 있어 처절한 시기이다. 취업, 결혼, 육아∼ 정신없이 돌아치는 때이다. 직업적인 능력을 쌓아 가면서도 동료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하는 과업이 주어진다. 이 단계를 성공적으로 잘 완수한 사람은 40대에 접어들면 포근한 가정과 자아실현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게 된다. 에릭슨은 40~65세까지의 시기를 <생산성의 시기라>고 규정했다. 이 틀을 견고히 세우지 않으면 이후 세대가 불안정해 지기도 한다. 그 여파는 정체된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생산성과 정체성의 갈림길에 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를 향한 작은 첫걸음이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과거의 사람,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자연이 친밀감을 만들어 주었다. 닥치는 대로 만지고 따먹고 어떤 생물이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지금은 핸드폰이라는 매개체가 그것을 대신한다. 안타깝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싫증내지 않고 즐기며 사는 것.-거기에 젊음의 비결이 숨어있다.
배는 물건을 작게 실을수록 빨리 내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배 밑창에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큰 돌이나 바닷물을 담아놓아야만 한다. 그 무게중심이 나이이다. 결코 나이는 헛먹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경륜만큼 삶의 지혜와 노하우가 발휘된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중년에 다다르기가 더딜 뿐 이후에는 달리는 기차처럼 나이는 세대를 바꾸며 쌓여만 간다. 나이가 들었어도 뭐라도 해보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도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