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릴 때는 아이들만 보였다. 어디를 가든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다.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이 오밀조밀 앉아 수업을 들어야만 하였다. 복도를 지날 때면 서로를 비집고 지나갈 정도였다. 그리 경제적으로 넉넉할 때가 아니어서 대부분 행색은 초라했지만 학교는 생동감이 넘쳤다. 서로 부대끼며 아이들은 누구보다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런데 조금씩 나라경제가 좋아지면서 윗사람들은 인구정책에 몰두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좁디좁은 한반도가 사람들로 북적이고 결국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때부터 산아제한은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가는 곳마다 포스터가 나붙고 방송마다 여론몰이를 하게 된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60년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70년대)”가 아직도 남아선호사상이 기승을 부리던 8-90년대에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전환을 시도한다. 실로 내가 천호동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80년대 초반 매일 보건소에서 “원치 않은 임신을 하신분이나 산아제한을 원하시는 분은 무료시술을 해 드립니다.” 방송하며 엄마들을 유혹(?)했다. 우리민족이 얼마나 순진한가? 정책을 실효를 거두다 못해 이제는 출산율 0.98명으로 우리나라 여성이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는 1명도 되지 않는다. 이대로 2050년대가 되면 나라 존폐를 걱정할 상황이 된 것이다.
저출산・고령화시대를 맞은 우리나라는 2021년부터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아 ‘인구 자연감소 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나라는 평균수명 연장으로 80세 이상 고령 인구가 최근 연평균 10만 명씩 늘고 있어 고령 사망자도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출산율 감소가 우리나라 경제 및 사회 근간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심각성을 의식하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젊은이들은 결혼을 외면할 뿐 아니라 아이 낳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자, 이제 캐치프레이즈가 현저히 바뀌었다. “엄마 젖, 건강한 다음 세대를 위한 약속입니다.” “아빠, 혼자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가슴이 아리다.
어른들은 “요사이 젊은이들은 이기적이라서 아이를 안 낳는다.”고 속단한다. 아니다. 생존의 문제이다. 우리가 어릴 때처럼 낳기만 하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삶의 퀄리티가 매우 높아졌다. 하나를 키워도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것이 젊은 세대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렇게 키우려니 여러 면에서 희생이 필요하다. 재정도 재정이지만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곳이 마땅치가 않다. 통계에 의하면 여성이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면 60%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실정이란다. 이제는 농경사회가 아니다. 부부가 열심히 벌어도 가정경제를 감당하기 힘든 세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아이를 둘 셋 낳는다는 것은 엄두를 못 낼 일이다.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다. 현실이 옛날처럼 자녀를 마음 놓고 출산할 상황이 못 되는 것이다.
사회도 사회지만 교회는 더 심각하다. 이미 주일학교가 사라진 교회가 많다. 따라서 청년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2020년부터는 대학정원이 미달되는 사태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시골에 가면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정겨웠다. 냇가에도, 느티나무 밑에도, 동네마당에도 아이들 노는 소리로 생동감이 넘쳤다. 이제는 노인들뿐이다. 그것도 60대는 청년이라 할 수 있고 그 이상의 고령 노인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폐가, 폐교가 속출하고 이 세대가 마치면 미래가 불확실할 정도로 암담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사람의 얄팍한 생각으로, 인간의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시안적인 정책이 결국 저출산이라는 재앙을 초래했다. 이 상황을 회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을 듯싶다. 저녁밥상에 둘러앉아 호롱불 밑에서도 맛나게 음식을 먹으며 풍성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절이 그래서 그립다. 그 밥상에서 동네 소식을 다 들었고 아버지의 훈육은 위력을 발휘하며 가정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자유롭게 아가를 출산하고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밝게 자라는 세상을 그래서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