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라디오 세대이다. 당시 TV를 소유한 집은 부유의 상징일 정도로 드물었다. 오로지 라디오를 의지하며 음악과 드라마, 뉴스를 접하며 살았다. 내 삶을 돌아보면 가장 고민이 많았던 때가 고교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다정한 친구처럼 다가온 것이 심야방송이었다. 각 방송국마다 밤이 깊어지면 당시 유명인들을 DJ로 내세워 경쟁하듯 방송을 내보냈다. FM 방송이 있기 전이어서 음질도 안 좋았고 라디오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방향을 맞춰가며 들어야 했던 AM 방송. 밤늦게까지 공부하며 책상머리에서 듣던 심야방송 프로그램은 그나마 우리들의 숨통을 터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 당시 들었던 MBC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가 17일로 50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이다. 1969년 3월 17일에 첫 방송을 내보낸 이후 반세기를 달려온 것이다. 별밤을 방송하는 DJ를 ‘별밤지기’라고 했다. 이는 이문세 DJ 시절 한 청취자가 '등대지기'라는 말에서 창안하여 엽서로 제안한 것을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별밤의 오프닝 곡은 별밤지기 김기덕이 직접 고른 Frank Pourcel의 “Merci Cherie”를 쓰고 있다. 밤 10시 5분 시그널음악은 별밤을 열며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50년 동안 거쳐간 DJ만 26명이다. 따라서 같은 별밤을 들었어도 누가 DJ를 했느냐에 따라 세대가 갈라진다. 처음 편성 당시에는 청소년 교양 진작 차원의 명사와의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하기야 밤 10시만 되면 “청소년 여러분!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길거리를 방황하지 말고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이 나왔던 시대이니까. 초대 별밤지기는 오남열 전 아나운서. 2대 별밤지기는 장학퀴즈 진행자로 당시 상한가를 달리던 차인태 아나운서가 맡았다. 3대 별밤지기로 유명 DJ였던 이종환이 들어서면서 음악 방송으로 전환했다.
유명한 별밤지기로는 김기덕과 이문세가 있으며, 특히 이문세는 무려 11년 동안 별밤지기로 있었기에 몇 년전 열풍을 몰아쳤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이문세의 별명은 "밤의 문교부 장관"이었다. 그 외에 별밤지기를 거쳐 간 사람 중 유명인으로는 조영남, 서세원, 이수만, 이적, 이휘재 등이 있다. 내 고교시절에는 카셋트가 유행하던 때라 방송을 테이프에 담아 듣고 다니던 추억이 있다. 아무리 엽서를 보내도 내 것이 안 나온 이유를 엽서전시회에 가서야 깨달았다. 현란, 화려, 수, 조각등 엄청난 정성이 담겨진 엽서라야 눈에 띄웠던 것이다.
별밤의 애청자였다면 “당시 누가 DJ였느냐?”고 물으면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문세 DJ에 익숙하다면 당신은 30대~40대이다. 1996년 12월 1일. 고별방송 중 한 여고생과의 전화연결에서 여고생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이문세도 눈물을 흘릴 것은 전설로 남아있다. 이후 별밤지기를 물려받았던 이적이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고 한다. 우리세대는 이종환의 음성에 익숙하다. 냉정한듯하면서도 차분하고 정감 있는 DJ로 기억한다. 별밤 50년이라는 소식을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당시 심야방송을 듣지 않고는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대화가 안 될 정도였다. 주로 팝송을 많이 틀었는데 지금도 그때 들었던 노래를 접할때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추억에 젖는다.
5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밤을 지켜온 별밤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사연에 접하고 이어 들려주는 음악은 젊은 가슴에 양식처럼 스며들었다. 사랑, 이별, 그리움, 감동, 아픔과 환희가 섞이며 50년이 흘렀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악인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 시대를 함께 살며 같은 음악을 들으며 자라온 청춘들을 응원하고 싶다. 밤하늘을 바라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빛나는 별들의 향연을 보며 어린 날 심야방송에 심취했던 나를 다시 투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