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한 백수 명예퇴직

by 관리자 posted Jun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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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런히 일을 하며 달리는 세대에는 쉬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언제나 일에서 자유로워져서 쉴 수 있을까?’ 젊은 직장인들의 한결같은 하소연이다. 해서 내 오랜 친구는 50에 접어들며 이런 넋두리를 했다. “재철아, 난 일찍 은퇴하고 싶어. 60대 초반이면 일반 목회를 접고 내가 꿈꿔왔던 일들을 추구하려 한다.” 그런데 50대 후반이 되어가며 친구는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급기야 채 60이 되기 전에 은퇴가 없는 사역지로 옮겨가 버렸다. 사람 참 모를 일이다. 사람은 다 그런 것 같다. 일을 할 때는 지겨워하고 막상 그 일을 접을 때가 다가오면 아쉬워하며 놓기를 주저하게 된다.

 

 20대에 입사하여 평생을 헌신해 온 직장인이 있다. 이제 회사 중진이 되어 소신껏 꿈을 펼치려는 나이가 되자 회사에서는 보이지 않은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정년보다 조금 일찍 퇴직을 하면 넉넉한 퇴직금을 보장한다는 유혹이다. 오랫동안 갈등하던 끝에 드디어 퇴직을 했다. 이름하여 명예퇴직이다. 수십년간 근무하던 직장이니 시원함보다는 섭섭함이 앞선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직장 동료들은 한 아름의 편지를 안겨 주었다. 며칠이 걸려 읽은 편지들은 미소 짓게 만든다.

 

 명예퇴직을 한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나간다. 제일 먼저 찾아 온 것은 여유로움이다. 뜬금없이 찾아드는 불면의 밤도 늦잠을 잘 수 있으니 초조하지 않다. 출근을 위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미친 듯이 뛰어 나가지 않아도 된다. 포근한 침대 속에서 즐기는 아침잠의 그 느긋함은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충분한 잠으로 전날의 피로가 씻어 지니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된다. 은행이나 병원진료 등도 눈치 보지 않고 들를 수 있어 좋다. 운동한답시고 늦은 밤에 들어 와 아침식사 준비로 밤늦게 떨그럭거리지 않아도 된다.

 

 초저녁부터 TV앞에 앉아 리모컨 운전만 열심히 하면 된다. 친구들이랑 차도 마시고 바람도 쏘이며 조잘대는 그 재미도 함께 할 수 있다. 평일 낮의 나들이가 얼마나 편안한지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퇴직하고 나니 어떠냐?”고 물어온다. 아직은 여유로움 외에는 잘 모르겠다. 연금이 월급만 하겠는가? 반 이하로 확 줄어버린 연금으로 경제적 부감감이야 당연히 느낀다. 시간이 귀해 늘 택시를 타고 다니던 그가 요즘은 버스나 전철을 타게 된다. 그 속에서 타인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또 다른 인생을 느끼는 것도 흥미롭다.

퇴직을 하고 나면 4단계의 대학이 있다고 했던가? 하루 종일 바빠 하바드 대학. 하루 종일 와이프 뒤만 따라 다녀 하와이 대학. 하루 종일 동네 경로당에 있어 동경 대학. 그것도 다리 아파 못하면 방구석에 콕 박혀 방콕 대학이라지. 수십년간 직장에 매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백수생활에 젖어 들고 있다. 이제는 편안하게 동창들을 만난다. 자식들도 모두 장성해서 대부분 짝을 맞추었고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같이 살아온 아내와 함께 한 시름 놓고 적당히 보기 좋은 주름살로 쌓아온 연륜도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이다.

 

 화제는 자연히 황혼의 삶을 어떻게 잘 마무리 할 수 있는가가 중심이었다. 옛일에 대한 향수를 더듬기보다 앞으로 맞이할 백수로서의 시간과 생활에 어떻게 잘 적응하며 여생을 마무리 하는가가 대화의 줄을 이어간다. 세상일은 늘 변화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백수에게도 기회가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퇴직했다고 멋진 꿈까지 접어서는 안 된다. 자신감과 긍정적인 태도로 퇴직의 여유로움을 느껴야 한다. 마음속에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그 속에 끝없는 도전과 희망의 나무를 심는 것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가면 현역에서 물러나는 일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 않아 죽을 날만 헤아리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나이에 덮여 백수의 아름다움 자체를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백수가 무엇인가? 백 가지 손을 가지고 최소한 백 가지의 여유를 만들 수 있는 때가 아닐까? 가슴을 펴고 백수의 노래를 불러보자. 그것이 진정 명예퇴직자의 영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