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눈앞만 보고 걷는 사람이 있고, 내다보고 사는 인생이 있다. 중학교 동창 중에 희한한 친구가 있다. 남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을때에 미국을 품는다. 벼라별 방법을 동원하여 그는 중졸의 학력으로 뉴욕행에 성공한다. 워낙 부지런한 그는 바닥부터 성심을 다해 애를 쓴 결과 이제는 곳곳에 사업장(Beauty Supply)을 개설하고 경영하는 기업인이 되었다. 때로는 가방줄이 짧아 애를 먹을 때도 있지만 얼마나 당당하게 살고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하다. 그에게 물었다. “아니, 그 시절에 미국은 어떻게 생각한거야?” 친구 왈, “몰라? 어느 날 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오면서 미국만 생각했어.” 꿈은 사람을 깨어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가? 푸르러가는 숲을 보며 곰 씹어 보았다. 목사의 생명은 영성이다. 아니 그것은 성직자 뿐 아니라 모든 인생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영적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사람은 육체적인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행복하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다들 가난했다. 서로 어려운 처지였기에 ‘그런가보다’하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풍요로움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상대적 박탈감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정신적, 영적으로도 평온함이 찾아오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풍요로워질수록 더 깊은 혼돈과 고독에 잠기게 되면서 현대인들은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허덕이고 있다. 나에게 영성은 생각의 잠에서 깨어나 사실의 눈을 뜨는 것이다. 잠은 노예 의식이고 깨어나는 것은 주인 의식이다. 깨어나면 내가 그것들을 마음대로 하지만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들이 나를 마음대로 하게 된다. 그래서 깨어나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보고 아는 것이 영성이다. 생각에서 사실로, 노예에서 주인으로, 에서에서 야곱으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출애굽은 영성의 최고의 길이다.
나에게 영성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넘어선 다른 차원에서 사는 것이다. 2000년에 접어들며 나는 영성에 몰입하였다. 한국에서 영성훈련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다가 만난 귀한 친구가 “밥퍼 최일도 목사”이다. 영성은 깨어나는 것이다. 저녁 침실에 누우면 죽었다가 새날 아침에는 부활을 한다. 사건을 만나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이 의미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 했는데 깨어나보니 그가 스승이었다. 힘든 부모님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인생이 깨어나보니 나를 진중하고 심연의 사람이 되게 한 소중한 분들이었다. 그리하여 삶에서 함께하는 ‘영성의 오솔길’은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와 그의 이야기가 만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되는 그윽한 길이 되어진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가기전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천년이 하루와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데 시간의 길고 짧음, 어제 오늘 내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은 헬라어로 “크로노스”이다. 단순히 인간의 역사 속에 흘러가는 시간이다. 즉 연대기적 시간이다. “카이로스”가 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나타난 의미 있는 시간, 특정한 시간을 말한다.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고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지옥이다.
나에게 영성은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I AM)로부터 왔다가 나(I AM)에게로 가는 것이다. 깨어난 사람에게는 죽음도 의미가 없다. 지구별에 왔다가 때가 되어 돌아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깨어 있으면 아침에 도를 들었으니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영성이다. 깨어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