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만나면 인사를 한다. “요즈음 재미 좋으세요?” 재미, 복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사는 맛이 있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갈라진다. “그저, 그렇지요.” 내지는 “예, 좋습니다.” 사실 사람은 재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같다. 처음 겪어보는 일, 찾아가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은 재미를 느끼며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따라붙는 수식어가 “첫”이다. 첫 사랑, 첫 순간, 첫 연애, 첫 직장, 첫 경험 등. 풋풋하고 어설프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것이 “첫”이다. 그러면서 나이가 들어가며 되뇌이고 곰 씹어보며 그리워하는 것도 “첫”이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처음은 그리도 아름답고 짜릿하건만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사람은 매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절경을 찾아 탄성을 지르지만 다음에 가보면 그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먹어보는 별식에 놀란 눈을 치켜뜨지만 다음에 그 음식을 먹을 때는 그 맛이 안난다. 우리가 어릴때는 계란이 귀하고 귀했다. 이제는 싸고 흔한 것이 달걀이다. 찜을 하고 후라이를 해도 어릴 때 먹던 그 맛이 안 나는 것은 왜일까? 만남이 아름다워 사랑을 나누고 부부가 되지만 세월이 깊어지며 이내 밋밋한 삶을 이어간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일까?
사람은 누구나 기쁨을 추구하며 산다. 좀더 기쁘게 살기 위해 공부를 하고 돈을 번다. 멋진 남성(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민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더 자극적이고 깊은 쾌락을 탐닉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완벽한 환경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범한 인류시조들에게서 흘러들어온 무서운 유전자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할 때 사람은 기쁨의 경계선을 넘어 쾌락에 몸과 마음을 던지게 된다. 일상의 소소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이 그래서 소중하다.
한국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대하며 충격을 받는다. 공중파 방송 뉴스를 진행하던 메인 앵커가. 상당한 연봉을 받으며 인기를 누리던 프로농구 스타 선수가,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연예인이, 법을 집행하고 판결해야 하는 판사까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탄식이 나온다. 그 자리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고와 땀과 눈물, 희생이 있었을까? 그 지위나 풍겨지는 인상을 보면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다 무너지는 것일까?
들어가 보면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그래서 무섭다. 사랑받지 못하고 그래서 위로받으려고 행하던 습관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를 옥죄이며 끌고 다니는 것이다. 사춘기에나 행하던 요상한 짓(?)을 나이가 들어서도 버리지 못한다. 쾌락의 기억이 뇌에 저장되어 긴장을 풀면 여지없이 그곳으로 방향을 잡게 만든다. 쾌락에 몸을 던지는 순간부터 그들이 쌓아놓은 모든 명성과 명예는 모래성처럼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심리학자 칼 융은 행복을 Pleasure와 Happiness, Joy로 설명한다. ‘Pleasure’는 감각적인 쾌락이고, ‘Happiness’는 정신적으로 기분이 좋은 상태, ‘Joy’는 깊은 깨달음의 즐거움을 뜻한다. Pleasure는 케이크를 먹는 것과 같다. 첫 한 입은 정말 맛있다. 그런데 열 입쯤 먹으면 질린다. 성(性)도 그렇고, 마약도 그렇다. 모든 즐거움이 다 그렇다. 그것을 넘어 참 기쁨(Happiness, Joy)에 이르려면 전제가 있어야 한다. 바로 고통이다. 깊은 고통을 통과하며 얻는 Joy가 진정한 기쁨이다. 왜냐하면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기 때문이다.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쾌락은 순간이다. 결코 길게 간직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결국 그 농도를 점점 높여야 하고 권태와 절망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진정한 기쁨은 내 자존감을 높여준다. 하지만 쾌락은 그 순간이 지나면 처절한 아픔과 초라함이 엄습한다. 표현하기 힘든 절망감까지 찾아든다. 아픔을 넘어서서 누리는 평안, 성취감은 내 삶을 고상하게 하고 참 기쁨을 안겨준다. 단조롭던 음악이 대교향곡이 되고 흑백 사진이 총천연색 사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