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의 찬양

by 관리자 posted Sep 06, 20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하경혜.png

 

 장애 중에 눈이 안 보이는 어려움은 가장 극한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중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이 속속 배출된 것을 보면 고난은 오히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끈질긴 내성을 키워내는 것 같다. 한국이 낳은 강영우 박사를 보라! 그는 시각 장애의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미국 정부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특별 보좌관으로 신임을 얻었다. 밀알선교단의 창설자이며, 세계 밀알 연합회 회장인 이재서 박사도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몹시 가난했으며, 16살 때 시력을 상실한 중도 장애인이다.

 

 신학대학 3학년 때, 그는 세계 장애인 전도의 꿈을 품고 밀알선교단을 창설하였으며, 1984년 맨주먹으로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와서 온갖 역경을 넘어서서 사회 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평생 총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지난 5월 총신대학교 총장으로 당선되어 세계 최초 시각장애인 대학 총장이 되었다. 시력을 잃었다는 것을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에는 아무 장해(障害)가 될 수 없음을 그들의 삶을 통해 증명 해 주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는데 하경혜 자매를 만나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인터넷으로 장애우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희망 방송국이 있다. 희망 방송에서 2003년 제 1회 장애인 스타 콘테스트를 개최하였는데 그때 대상을 차지한 시각장애인이 하경혜 자매이다. 하경혜 자매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구성하여 방영하였는데 보이지 않아도라는 영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하경혜 자매는 오래전 한달여 동안 L.A.에서 순회공연을 하고 필라델피아로 넘어왔다. 시각장애인으로 국제항공기를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L.A.에 올 때는 한국 항공기를 타고 왔기에 아무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미국 항공기를 타고 L.A.에서 필라로 와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우리 단원들은 하 자매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기도했다. 영어도 안 되고, 눈도 안 보이는 악조건 속에서 하 자매는 무사히 필라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몹시 피곤한 모습이었지만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그녀는 기도로 준비한 때문인지 흐트러짐이 없는 당찬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찬양 집회는 가는 곳마다 성황을 이루었고, 감동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하경혜 자매는 살아있는 찬양을 하는 자매이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찬양을 부른다. 목소리도 호소력이 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그녀가 찬양 한곡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영감 있는 찬양, 살아있는 찬양을 체험한 집회였다. 그녀의 간증과 찬양은 가식이 없다. 간증은 잔잔하고, 찬양은 열정적이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마치고 교회를 나설 때였다. 한 성도가 하 자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제까지 죽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자매님의 찬양과 간증을 듣고 새로운 소망을 얻었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우리는 그때 모두 온몸이 오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하 자매에게 말했다. “한 영혼 살리셨군요시각 장애 하경혜 자매를 만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시각장애인들도 드라마를 즐긴다는 것. 그리고 시각장애인은 꿈을 Audio로 밖에는 꾸지 못한다는 것을

 

 하경혜 자매는 말투가 무지 애교스럽다. 한국에 있는 남자 친구와 전화하는 소리를 들으면 닭살(?)이 솟는다. 예의가 바르다. 어려운 환경에 살았지만 밝고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한 주간을 같이 지내며 그녀가 시각장애인인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이제 그녀는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헌신하고 있다. 하 자매의 가슴을 적시는 찬양, 그리고 해맑은 웃음소리가 그리워지는 가을의 초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