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밀알선교단을 창립하고 이끌어오는 이재서 박사가 총신대학교 총장에 출마하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대학교 총장?” 이제 은퇴를 하고 물러나는 시점인데 난데없이 총장 출마라니? 함께 사역하는 단장들도 다들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무엇보다 승산이 0%라는 것이다. 11명이 출마한 총신대학교 총장 경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줄곧 1위를 달리더니 마침내 총장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다. 다들 혀를 내둘렀다. 실로 불가능의 벽을 뚫고 그는 당당히 세계 최초 시각장애 총장이 된 것이다.
나의 모교이지만 총신대학교는 면학 분위기가 무너진지 오래이다. 전임 총장의 운영 미숙과 신뢰상실로 상처투성이의 학교가 되어버렸다. 그런 와중에 시각장애를 가진 이재서 박사가 취임하기에 이른다. 다들 많은 염려를 했지만 밀알을 40년 이끌어온 그의 탁월한 리더십은 학교를 서서히 정상화시켜 나가고 있다. 총장이 되자마자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각종 모임에 참석을 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총장의 입지와 학교 정상화 두 마리에 토끼를 능숙히 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이재서 총장은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런 실명으로, 죽음 같은 고통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고교시절에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그레이엄 목사 초청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실명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총신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9년 10월 16일 한국밀알선교단을 설립하여 장애인선교의 기치를 들어 올리게 된다. 1984년에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홀로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을 와서 각종 학위를 취득하게 되고 그런 와중에 필라델피아 밀알선교단을 시작으로 미주 곳곳에 밀알선교단을 세우게 된다.
1994년 귀국 이후에는 모교인 총신대학교의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헌신한 끝에 학문의 장 대학과 봉사의 현장 밀알에서 교수와 총재로 살아온 그는 총신대학교 제7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5월 25일부터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총장은 누구를 만나던 점자컴퓨터를 앞에 놓고 대화를 한다. 그는 1967년부터 점자로 일기를 쓰고 있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손은 분주하다. 꼼꼼하게 메모하는 습관을 50년 넘게 유지해왔다. 가까이서 모시며 느끼는 것은 그는 상당한 노력파이며 자상하고 이타적인 분임을 깨닫는다.
총장실은 취임을 축하하는 화환들로 푸릇푸릇하다. 원목 가구들과 화분이 어우러져 마치 수목원에 온 것 같은 분위기이다. 대부분 이 총장 이야기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보낸 것이다. 장애인이 보내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보낸 화분도 많단다. 어떤 이는 이 총장 인터뷰가 실린 일간지를 액자에 고이 넣어서 보내기도 했다. “총장 당선 소식이 알려지고 내 일처럼 기뻐해 준 장애인이 많았어요. 어떤 30대 여성은 갑자기 시력을 잃어서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저를 보고 희망을 되찾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본과의 축구 경기에서 골이 터지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고도 하더라고요. 한이 풀렸다, 응어리가 풀렸다는 의견도 있었구요. 제가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과 편견을 깼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장애인이 많았습니다.”
그가 총장이 될 수 있었던 숨은 공로자는 학교 구성원들이다. 시각장애인이 총장선거에 나가겠다고 할 때에 그 누구도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25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한결같이 곁에서 묵묵히 내조해 준 한점숙 사모의 내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총장이 된 것도 위대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장애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대학교 총장이 되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장애는 결코 삶의 장애가 될 수 없음을 그는 증명해 보였다. 희망, 꿈을 향한 도전. 그의 업적보다 그의 삶의 태도는 모두의 마음에 훈풍이 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