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지던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은 어디나 가기를 좋아하던 나를 언제나 데리고 다니셨다. 몸이 온전치 못한 아들, ‘기우뚱’거리며 걸어 다니는 아들이 그분들에게는 조금도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으셨나 보다. ‘자녀가 장애가 있다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부모가 있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집안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고 장애아를 집안에 가두어 놓고 전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게 했다. 유교 관념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에게는 장애인이 단지 “불구자, 병신”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경제 형편이 넉넉하고 조금 의식이 깨어있는 분들은 “명휘원”이라는 소아마비 장애인들만을 교육하는 특수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좋은 부모님을 만났다. 아들이 무언가 하고 싶어하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밀어주셨다. 나의 부모님은 아들이 장애가 있다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어디를 가나 당당하게 나를 소개하고 활보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셨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부모님에게 물어오는 질문이 있다. “어쩌다가 아드님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예, 소아마비에 걸려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답을 해 주신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라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다. 대답을 듣는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혀를 차며 “쯧쯧, 잘생기고 똑똑해 보이는데 안됐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부모님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린 시절에는 장애인 중에 소아마비 장애인들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지금처럼 장애의 종류가 많지 않았던지 아니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애인들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집안에서 가두어 키웠던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후자의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일례로 어느 목사님이 교회 중직 가정에 심방을 갔다가 화장실을 잘못 찾아 방문을 열었더니 장애가 극심한 그 집의 아들이 튀어나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자식을 차마 죽일 수는 없고 집안에 장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집안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가끔 운전을 하다가 장애인이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며 가는 모습을 본다. 휠체어 뒤쪽에 깃발을 달고 열심히 내달린다. 혹시라도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염려도 된다. 얼마나 자유로울까? 얼마나 행복할까? 아마 그것은 오랜 날 병상에 누워 있다가 기력을 회복하여 바깥바람을 쐬러 나오는 그런 기분일 것이다. 같은 장애인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내 가슴이 뛴다.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가 좋다. ‘널싱 홈’에서 홀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밀알선교단 화요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긴다. 일주일에 한번 차를 타고 밀알에 오가며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밀알선교단이 좋은 이유는 장애인들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준다는 것이다. 지적장애인들은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앞뒤도 안 맞고 대화의 방향이 일정하지도 않다. 그래도 다 들어주고 반응해준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향할때에 장애인들의 얼굴을 달덩이처럼 밝아진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그런 공동체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미국은 어디에나 장애인 편의시설을 의무화하고 있어 장애인들의 이동경로가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한국에 가보면 아직도 장애인들이 이동하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길거리, 시설을 본다. 장애인들은 누구보다 바깥바람을 많이 쐬어야만 한다. 불편해도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장애인이 밀알선교단에 오면 동질감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밀알에 나오면 삶의 이유를 깨닫게 된다. 장애인들이여, 밀알로 오라! 그리하면 행복의 생수를 마시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