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는 성장하며 이성을 그리워한다. 어린 마음에 이성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구름 위를 걷는 몽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 애만 보면 가슴이 뛴다. 그 애와 우연히 눈만 마주쳐도 밤을 설친다. 그렇게 연민을 품다가 드디어 연(緣)을 맺는다. 내가 좋아할 때 상대도 좋아하면 그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애는 다른 애를 바라보고 정작 부담스러운 아이는 내게 다가서려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용기이다. 용기가 지나치다 나이가 들어가는 안타까운 젊은이들이 있다. 주위에서 “눈이 높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첫눈에 반해서 불같은 사랑을 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첫눈에 반해 아내에게 용감하게 들이댔고 부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에 눈을 뜨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된다. 혹시 옛날 그 애와 나누던 편지를 발견할 때가 있는가? 사춘기에 알알이 써 내려간 일기장을 본 적이 있는가? 갑자기 그 애가 생각이 났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구애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 생각나는 구절은 “내가 네 눈이 되어 나를 보고, 너는 내 눈이 되어 나를 본다면…”이다. 손발이 오글거린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런 편지를 썼을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든 부부가 서로 죽도록 사랑을 해서 결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친정을 벗어나고 싶어서, 다가오는 사람이 그럴듯하고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나는 별로인데 주위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괜찮다”고 밀어붙여서 부부의 연을 맺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멋진 주인공들이 만나 환상적인 연애를 하는 멜로드라마에 빠지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대리만족 심리이다. 나이가 들면 짝을 만나고 결혼을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허니문의 달콤함을 만끽하고 꿈에서 깨어날 여유도 없이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을 닮아가며 가정은 세워져 간다. 진정 Family= Father and Mother. I Love You! 가 되어간다.
참 신기하다. 이제는 다 장성했지만 30대에 한 상에서 밥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물은 적이 많다. “너희들 어디에서 왔니?” 분명히 둘이 시작한 가정인데 어느새 알토랑 같은 아이들이 수저를 움직이며 밥을 먹는 것이 신비로웠다. 나를 닮은 아이들, 우리 부부를 빼다 박은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이들을 키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모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인생 여정 속에 그 아이들이 부부에게 안겨주는 행복감이 크기에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견디며 영화를 찍는다.
그렇게 엄마가 초라해 보였고, 그래서 엄마처럼은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나이가 들어보니 어쩜 엄마의 인생을 살고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으리라 그렇게 소리를 쳤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아버지처럼 살고 있다.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 명령만 내리던 꼰대의 모습이 오늘 내 삶의 스크린에 그대로 투영된다. 미칠 일이다. 우리는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한다. 한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존재라는 뜻이다. 의식하든 못하든 그렇게 가족은 닮아가며 영화를 찍는다.
부모는 자식을 주인공으로 인생의 영화를 찍는다. 부부로 시작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장성하면 아이들의 동선을 따라 영화를 찍는다. 숱한 사연을 헤치고 아이들을 키우고 난 후에 돌아보면 인생의 필름에 담은 장면 하나하나가 보람을 느끼게 하고 행복을 안긴다. 내가 찍은 작품이 자식이다. 잘 키워야 한다. 잘 가꾸어야 한다. 왜? 아이들은 금방 자라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은 “레디 액션!” 소리만 치면 되지만 부모는 아이들에게 본을 보여주며 길을 닦아야 하기에 더 힘들고 고된 감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