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렸다. 뉴욕의 절친 목사 사모였다. “어쩐 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긴박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지금 목사님이 코로나바이러스 양성판정을 받고 상태가 악화되어 맨하탄 모 병원 중환자실에 들어가셨어요.” 앞이 하얘졌다. 워낙 건강하던 친구였고 일주일 전에 통화하면서 농담반 진담반 “조심하라!”며 전화를 끊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왔다. “사모님, 어떻게 해요?” “기도해 주세요. 우리 성도들 오늘부터 밤 9시마다 작정 기도 들어갑니다. 목사님도 함께 기도해 주세요.” 전화를 끊고 아내를 불렀다. 우리 부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박 목사, 어떻게 하냐?” 그날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매어 달렸고 친구 목사는 천만다행으로 소생하여 회복중에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와중에 L.A. 베델교회 손인식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접해야 했다. 평소 존경하고 가까이 지내던 목사님. 모범적인 목회를 하시며 조기 은퇴(65세)를 선언하고 탈북자 선교에 온 힘을 기울이시던 목사님, 통곡기도회를 열어 북한선교의 꿈을 구체적으로 펼치시던 분.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항상 명쾌하고 진취적인 메시지로 성도들은 일깨우던 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무거웠다. 향년 71세라는 것이 너무 아쉽다. 사위가 필라델피아 출신이어서 평상시 사돈과도 사이가 돈독했기에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한참을 기도했다. 장장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장례식을 인터넷으로 지켜보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지난 10일(금) 뉴욕 장영춘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같은 교단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어려운 시기에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떠나신 것이다. 뉴욕퀸즈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장장 38년을 목양하신 장 목사님은 이민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귀한 목회자였다.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목양일념하던 노종은 88세를 일기로 저 세상으로 홀연히 떠나갔다. 교회 목회뿐 아니라, 선교대회, 문서선교를 위한 미주크리스천 신문 창간, 신학교 설립 등 그의 목양의 폭은 굵고 넓었다. L.A. 베델교회, 퀸즈장로교회는 모두 수천명이 모이는 교회이다. 하지만 때가 어려워서인지 얼핏 비춰지는 예배당에는 화환만 즐비하고 가족만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분들의 가시는 길이 너무 쓸쓸해 보여 가슴이 아팠다.
부활절(12일) 오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형제처럼 지내던 장로님이 갑자기 숨을 거두셨다는 전갈이었다. 몇 번인가 외치며 “아니 왜요?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되물었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사회적거리유지 법령에 따라 장례식도 참석하질 못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지금도 그 우렁차던 기도 소리, 친근하게 대화하던 당찬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말이다. 그의 나이 63세. 어떻게 한창나이에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가는지? 한숨이 나온다. 진정 삶과 죽음의 거리는 한걸음 뿐인 것 같다.(사무엘상 20:3)
내 나이 22살에 경찰 생활로 다져진 다부진 체력을 가졌던 아버지가 몹쓸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더니 우리 가족을 뒤로하고 먼 길을 떠나셨다. 겨우 55세에 말이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안 큰아버지는 사촌 형님을 보내 아버지를 고향 포천으로 모셔오게 했다. 마지막인 것을 아셨던가? 문설주를 붙잡고 안 가려 버티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내 가슴에 각인되어있다. 요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떠나는 사람보다 남은 자의 아픔과 서러움은 견디기 힘든 무게로 짓눌러 댄다.
작자 미상의 시가 생각난다. “어쩌면 오늘일지도”(Perhaps Today) <평생에 세 번 온다는 행운이 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게도 첫사랑은 시작되겠지 어쩌면 오늘일지도.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언가 시작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열매를 거두기 위해 나무를 심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보고 싶은 반가운 친구가 찾아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맺힌 것을 풀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살아있는 날 동안 최선을 다하며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르는 그 날을 대비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