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길을 간다. 넓은 길, 좁은 길. 곧게 뻗은 길, 구부러진 길.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길이 생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애씀이 있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길의 종류는 많기도 많다.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에도 비행기가 다니는 길이 있다. 마음껏 속도를 내며 다니는 길(high way)이 있다. 바다에도 배가 다니는 길이 있고, 운하도 있다. 길이 있기에 사람이 그곳에 살 수 있는 것이리라!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을 보며 문득 어린 시절 거닐던 오솔길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시골에 사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골에서 산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큰 재산인지! 지금도 삶이 힘들고 마음이 곤고해 질 때면 눈을 감고 어린 시절 뛰어놀던 시골 풍경을 천천히 회상해 본다. 그리 높지 않은 아담한 뒷산, 집 앞을 흐르던 정겨운 시냇물, 저만치 보이던 앞산, 사시사철 변해가며 꿈을 주던 나무들과 꽃,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 새, 벌레들. 가을 하늘을 수놓던 고추잠자리, 저녁 무렵이면 집집마다 피어오르던 굴뚝 연기, 무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무 타는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농축되어 글을 토해내게 한다.
아침이면 오솔길을 따라 학교에 간다. 아직은 날씨가 추워서인지 입에서는 하이얀 입김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길옆에 피어오르는 온갖 풀들, 그 사이에 고개를 내미는 이름 모를 들꽃들. 논둑을 가로질러 이제 막 모내기를 해 놓은 논으로 뛰어드는 개구리 한 마리. 다리를 스치는 풀을 괜히 잡아 뜯어 입에 물고, 다리에 걸리는 돌은 저만치 차버린다. 이내 큰길(행길)에 접어들면 아랫마을 사는 친구들과 마주친다. 처음에는 눈웃음으로만 인사를 나눈 우리는 어느새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과 후 뭉쳐서 갈 곳까지 도모하며 학교에 도착한다.
오솔길이 너무 좁아 소달구지는 큰길 귀퉁이에 세워놓은 후 황소와 쇠스랑을 짊어진 옆집 아저씨가 오솔길을 지나갈 때면 잠시 논둑길로 몸을 비켜주어야만 한다. 지나가며 건네는 아저씨의 정겨운 말 한마디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따뜻하게 느껴지든지! 수줍음이 많던 시절, 오솔길에서 마주친 여자아이를 피해 저만치 논둑길로 달려가다가 애써 심어 놓은 콩 줄기를 밟고 논둑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토요일 오후, 오솔길을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오후부터 내일까지 이어지는 휴식이 너무 기뻐서 들뜬 마음으로 불러 제끼던 다양한 노랫가락- 동요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유행가까지.
걷다가 힘들면 걸터앉아 들여다보던 자그마한 도랑물, 미꾸라지의 현란함, 올챙이들의 몸놀림, 윗마을 논에서 흘러온 부평초까지. 그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오솔길은 결코 사람들이 옆으로 서서 갈 수 없다. 한 줄로 서서 지나가야만 한다. 길이 좁아 비껴 갈 수 없다. 한쪽에서 비켜주어야만 지나갈 수 있다. 그래서 마주치면 먼저 그 상황을 결정해야만 했다. 내가 먼저 지나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먼저 가도록 양보해야 할 것인지? 양보가 없이는 둘 다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길이 오솔길이다.
고속도로는 편리하기는 한데 너무 삭막하다. 속도는 빠를지 모르지만 사고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세상은 오직 빠르고 편리한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차가 질주하는 대로에서, 까아만 아스팔트 위에서 인생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오솔길에 접어들면 사람은 비로소 사람이 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웬지 모를 풍요감이 임하는 곳, 어쩌다 마주친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곳, 옆을 스치는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에도 시선이 가게 하는 곳, 양보가 있고, 따뜻한 인사말이 있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저절로 샘솟는 곳- 아, 그곳이 오솔길이여라!
삶의 지친 사람들이 찾아와 아픈 이야기를 마음껏 지절거리는 그곳, 오솔길 한켠에서 그들을 편안하게 맞아주는 오솔길 지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