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018.06.22 14:16

야학 선생

조회 수 4252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야학.jpg

 

 

  20대 초반 그러니까 신학대학 2학년 때였다. 같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김건영 전도사께서 주일 낮 예배 후 할 말이 있다.”며 다가왔다. 우리는 비어 있는 유년주일학교 예배 실 뒤편 탁자에 마주 앉았다. 용건은 나에게 야학 선생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매일 사당동까지(당시 우리 집은 청량리) 학교에 다니기도 버거운데 야학까지 담당하기에는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도사님의 너무도 간곡한 부탁이라 거절하기도 그렇고 생각 할 여유를 달라고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전도사님의 부탁에 응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야학이 열리는 곳은 월곡동이었다. 드디어 야학 첫 수업을 위해 출발하였다. 청량리에서 전철을 타고 성북역까지 갔다. 그곳에서 버스를 다시 타고 몇 정류장을 지나 내렸다. 당시 월곡동은 개발되기 전이라 허허벌판에 허술한 집들과 공장들이 드문드문 서있는 풍경이었다. 불편한 다리를 끌고 그것도 캄캄한 밤중에 지정한 공장을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드디어 높은 회색 담이 처진 공장에 당도했다. 기다리고 있던 선배 야학 선생의 인도를 따라 2층 교실로 들어섰다.

 

  자그마한 공간, 머리위에 켜져 있는 형광등 불빛, 그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30여명의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공원들이었고 대부분 여공들이었다. 이내 소개를 받고 단에 섰다. 모두다 이미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제 이름은 이재철 입니다. 지금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는 신학생이구요. 오늘부터 여러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가 끝나자 그들은 박수로 환대 해 주었고, 웃으며 자기들끼리 무어라 속삭였다.

 

  당시는 70년대 후반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에 시골에서 많은 10대들이 무작정 상경을 하는 때였다. 운이 좋아 친척이 있는 친구들은 보증을 서주어 공장에 취직을 했다. 일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대부분 낮은 임금을 받고 공장에서 일하는 그들의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공부에 대한 열의가 되살아나게 되었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마련해 준 공간이 야간학교였다. 검정고시 과정을 공부시키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당시 야간학교에는 나이가 든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나는 23세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16살에서 20살까지였고 어떤 학생은 나의 누이 나이 정도까지 보이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내 외모는 꽤나 매력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거기다 음악을 가르쳤으니 학생들의 인기는 얼마안가 나에게 쏠려 버렸다. 1주일에 단 한번 찾아가는 야간학교였지만 행복했다. 처음 야간학교를 찾아갈 때 코에 스며들던 월곡동 골목의 풋풋한 풀 향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음악을 가르치다보면 그들은 이론보다는 노래를 부르는 실기시간을 더 좋아했다.

 

  가끔 기타를 들고 가서 풍금과 맞춰 함께 노래를 불렀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기타를 치며 내가 독창을 했다. 음악시간은 그들의 삶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기쁨의 시간이었다. 음악책에 나와 있는 노래를 부르며 그들은 모두 아련한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제 세월이 지나 기억이 흐릿해 졌지만 많은 시간들을 그들과 함께 지내며 꿈을 심었다. 소설 상록수(작가 심훈)의 주인공 채영신의 심정으로 대화 속에서도 소망어린 단어를 많이 구사한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야학선생은 그해 가을, 10 · 26 사건이 터져 시국이 어수선해지면서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사람이 누리는 즐거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는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배우는 즐거움이다. 그들은 노는 즐거움 대신 배우는 즐거움을 택했던 사람들이었다. 공부를 가르치는 동안 그들 중에는 눈으로 말하는 학생도 있었고, 노래로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어느 하늘아래에서 누군가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모습이 문득 그리워진다.

 


  1. 다시 태어난다면

    부부는 참 신비하다. 처음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할 때는 못죽고 못사는데 평생 평탄하게 사는 부부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거의 세월의 흐름 속에 데면데면 밋밋한 관계가 된다. 누구 말처럼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고갈되어 그런 것인...
    Views24725
    Read More
  2. 모르는 것이 죄

    소크라테스는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것이 죄”라고 했다. 의식 지수 400이 이성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화를 내며 산다. 다 알지 않는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보다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다. 풀리...
    Views24226
    Read More
  3. 월남에서 돌아온 사나이

    2018년 봄. 후배 선교사로부터 집회요청을 받고 베트남을 방문하게 되었다. 베트남 행 비행기 안에서 초등학교 때 추억이 삼삼히 떠올랐다. 베트남?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월남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월남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야기...
    Views25798
    Read More
  4. 새해 2020

    새해가 밝았다. 2020.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신선한 이름이다.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우선 주어진 기본욕구가 채워지면 행복하다. 문제는 그 욕구충족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요, 나이가 들수록 그 한계가 점점 넓어지고 높아진다는 것이다. 다...
    Views24805
    Read More
  5. 연날리기

    바람이 분다. 겨울이라 그런지 바람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훑어대며 내는 소리는 ‘앙칼지다’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된다. 내가 어릴 때는 집이 다 창호지 문이었다. 어쩌다 자그마한 구멍이라도 생기면 파고드는 칼바람의 위력...
    Views27031
    Read More
  6. 나를 잃는 병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무서운 병은 어떤 것일까? 알츠하이머? 치매가 아닐까? 자신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가족들과 지인들을 안타깝고 힘들게 만드는 병. 얼마 전 명배우 윤정희 씨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부군이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
    Views26910
    Read More
  7.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정신과 창구에 비친 한국 가족 위기의 실상은 몇 가지 특징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병원 신경정신과 이시형 박사가 “우리 가족 이대로 좋은가?”라는 발표를 들여다보며 그 사실을 실감한다. 먼저는 남편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가 어릴 ...
    Views30047
    Read More
  8. 삶은 경험해야 할 신비

    어느새 2019년의 끝이 보인다. 금년에도 다들 열심히 살아왔다. 수많은 위기를 미소로 넘기며 당도한 12월이다. 이제 달랑 한 장 남은 캘린더 너머에 숨어있는 2020년을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갈수록 사람들은 ‘...
    Views27525
    Read More
  9. 고통의 의미

    지난 주간 충격적인 소식을 접해야 했다. 고교시절부터 우정을 나누는 죽마고우 임 목사가 뇌졸증으로 쓰러졌다는 급보였다. 앞이 캄캄했다. 지난 여름 한국에서 만나 함께 뒹굴며 지내다 왔는데. 워낙 키와 덩치가 커서 고교 시절부터 씨름을 하던 친구여서 ...
    Views28810
    Read More
  10. 민들레 식당

    민들레의 꽃말은 ‘사랑’과 ‘행복’이다. 민들레는 담장 밑이나 길가 등 어디에서나 잘 핀다. 늘 옆에 있고 친숙하며, 높은 곳보다 항상 낮은 지대에 자생한다. 잎이 필 때도 낮게 옆으로 핀다. '낮고 겸손한 꽃’ 민들레처럼...
    Views27658
    Read More
  11. 노년의 행복

    요사이 노년을 나이로 나누려는 것은 촌스러운(?)일이다. 워낙 건강한 분들이 많아 노인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송구스럽다. 굳이 인생을 계절로 표현하자면 늦가을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늙는 것이 서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삶의 수확을 거두는 시기가 노...
    Views28220
    Read More
  12. 최초 장애인 대학총장 이재서

    지난봄. 밀알선교단을 창립하고 이끌어오는 이재서 박사가 총신대학교 총장에 출마하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대학교 총장?” 이제 은퇴를 하고 물러나는 시점인데 난데없이 총장 출마라니? 함께 사역하는 단장들도 다...
    Views28654
    Read More
  13. 그래도 살아야 한다

    지난 14일. 배우 겸 가수인 설리(최진리)가 자택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녀의 나이 겨우 25살.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은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청순하고 빼어난 미모, 평소 밝은 성격의 그녀가 자살한 것은 커다란 충...
    Views29769
    Read More
  14. 가을, 밀알의 밤

    어느새 가을이다. 낯선 2019년과 친해지려 애쓰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겨울을 거쳐 봄,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새 초록이 지쳐가고 있다. 여기저기 온갖 자태를 뽐내며 물들어 가는 단풍이 매혹적이기는 한데 애처로워 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가을은 ...
    Views30046
    Read More
  15. 생각이 있기는 하니?

    생각? 사람들은 오늘도 생각을 한다. 아니 지금도 생각중이다. 그런데 정작 삶에는 철학도, 일관성도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냐?”라고 핀잔을 주면 “나도 나를 모르겠다.”고 대답을 한다. '나는 ...
    Views27639
    Read More
  16. 침묵 속에 버려진 청각장애인들

    “숨을 내쉬면서 혀로 목구멍을 막는 거야. ‘학’ 해 봐.” 6살 “별이”는 엄마와 ‘말 연습’을 하고 있다. 마주 앉은 엄마가 입을 크게 벌리고 “학”이라고 말하면 별이는 ‘하’ 아니면 &...
    Views31513
    Read More
  17. 사랑이란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죽지 못해 살아가게 된다.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난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
    Views27636
    Read More
  18. No Image

    이름이 무엇인고?

    사람은 물론 사물에는 이름이 다 붙는다. 10년 전 고교선배로부터 요크샤테리아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원래 지어진 이름이 있었지만 온 가족이 마주 앉아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기로 하였다. 갑론을박 끝에 “쵸코”라는 이름이 나왔다. “...
    Views28814
    Read More
  19. 이혼 지뢰밭

    어린 시절에 명절은 우리의 꿈이었고 긴긴날 잠못자게 하는 로망이었다. 가을 풍경이 짙어진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기쁨, 집안사람들을 모두 만나는 자리, 또래 친척 아이들을 만나 추억을 만드는 동산, 모처럼 산해진미를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
    Views28760
    Read More
  20. 시각장애인의 찬양

    장애 중에 눈이 안 보이는 어려움은 가장 극한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중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이 속속 배출된 것을 보면 고난은 오히려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끈질긴 내성을 키워내는 것 같다. 한국이...
    Views29036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35 Next
/ 35

주소: 423 Derstine Ave. Lansdale., PA 19446
Tel: (215) 913-3008
e-mail: philamilal@hotmail.com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