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5/16/2012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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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은 모자를 쓰지 않는다. 아니 쓰지 못한다. 사람들만이 모자를 쓴다. 따가운 햇볕을 차단하고 얼굴이 그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자를 쓴다. 단색인 모자도 쓰지만 언제부터인가 매우 현란한 색깔의 모자들이 등장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자를 가까이했다. 아버지가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고 다니시는 경찰모는 몹시도 무거웠다. 경찰모는 앞쪽이 거창하게 올라가고 비둘기가 날개를 펴고 자리 잡고 앉았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기에 그랬나보다. 모자 안쪽에는 땀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굵다란 고무호스가 둘러치고 있었다.

경찰 모자를 쓰고 계급장이 달린 정복을 입고 출퇴근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요샛말로 “짱”이었다. 아버지가 퇴근을 하셔서 모자를 벽에 걸어놓으시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시면 나는 몰래 아버지 모자를 써보았다. 아버지의 땀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찌른다. 모자가 커서 눈 밑에 까지 덮어 씌어 버렸다. 모자를 쓰고 거울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여 보는 것이 내 취미였다. 비가 올라치면 그 모자위에 비닐커버가 씌어졌고 여름에는 흰색의 천이 모자를 덮었다. 자전거를 타고 동리 곳곳을 누비며 민원을 살피시는 아버지의 멋진 모습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모자는 직업을 나타내기도 하고 직급을 표시해 주기도 한다. 내가 어릴 때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다. 어른들은 새싹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모자를 쓰고 열심히 일들을 하셨다. 나에게는 “초록색 모자”에 대한 서글픈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하려던 나의 꿈은 낙방을 맛보며 산산이 부서졌다. 양평중학교(경기도)에서는 상위의 실력을 나타내며 우리 집안에서 “장애를 가졌지만 제일 공부를 잘 한다.”고 칭찬받던 나였는데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옛날에는 합격자 발표를 학교중앙 건물에 벽보로 붙여 나갔다. 그 순간이 되면 학부모들과 당사자들의 모습은 초죽음이 된다. 심장이 약한 아이는 땅바닥만 쳐다보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벽보를 바라볼 정도였다.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에 시험을 치른 학교 교정에 들어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벽보가 붙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내가 이 학교에 들어가면 무엇부터 할까?’ 궁리가 많기도 많았다. 하지만 내 이름은 없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내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공교롭게도 내 앞과 뒤에 수험번호는 합격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쓸쓸히 돌아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 생애 첫 번째 실패였다. 죽고 싶었다. 한강 다리가 떠올랐다. 그냥 걸었다. 온전치 못한 걸음으로 몇 시간을 걸었다.

그러다가 당도한 곳이 청량리 시장이었다. 우연히 초록색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부터 나는 초록색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다녔다.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듯 했다.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었다. 평소 명랑하던 내 성격은 침울해 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감사한 것은 가족들의 세심한 보살핌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그냥 내 등만 어루만져 주셨다. 이제야 안다. 애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해 주시며 아들의 표정이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그때 나는 모자의 실용성을 터득했다. 모자를 착용하는 사람의 심리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인지 나는 지금도 모자를 쓴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모자를 쓰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따가운 태양광선을 피하기 위해 쓰는 모자는 당연하다. 하지만 항상 모자 쓰기를 즐겨한다면 그 사람은 우울증 초기현상을 겪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모자는 내 표정은 감추면서도 모든 사람과 상황은 볼 수 있는 희한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한편 모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나는 부러워한다. 이상하게 나는 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또 모자를 써서 머리가 눌리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어떠세요. 모자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