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우리들의 전설 5/28/2012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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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기쁨이 있는 것은 “친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친구가 참 많다. 그것도 오랜 지기들이 수두룩하다. 김치는 “묵은지”가 감칠맛이 있듯이 친구도 오랜 세월 변함없는 관계가 소중한 것 같다. 한국에 가면 3-40년 된 친구들이 맨발로 뛰어나온다. 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에는 “한복”이가 달려 나왔다. 미국에 온 이후에 소식이 끊어졌었는데 희한하게도 아내가 ‘Face Book’에 접속하면서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한복이는 고교 1학년 때 만나 3년 동안 함께 웅변반과 신앙부 활동을 하며 우정과 추억을 쌓았다.

특별히 한복이가 고마운 것은 고교 3년 내내 무거운 책가방을 들어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책가방은 장애를 가진 나를 금방 지치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내 곁에는 한복이가 있었다. 싫은 표정 한번 없이 가만히 다가와 가방을 옮겨갔다. 장안동 민물장어 집에 마주앉았다. 식사를 하다말고 “한복아, 고맙다” 말을 건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한복이가 당황하며 “자식아, 너 왜 그러냐?” 되받아온다. “얌마, 그때 내 무거운 책가방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구.” 친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창밖을 본다. 내가 한국에 있을때는 <테크노마트>에서 신사복 매장을 경영해서 옷을 많이도 제공(?)받았었는데 이제는 분당에서 원목가구를 생산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고교에 입학해서 선생님의 지시로 반 학생 신상을 정리하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다. “김봉채” 고향이 경기도 포천군 ‘이동’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뒷자리에 앉아있는 봉채 앞으로 다가섰다. “야, 너 고향이 이동이냐?” 아는 사람은 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키가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그때 나는 7번이었고, 봉채의 키는 182Cm이었다. 봉채가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일동 ‘화현’이 고향이야.” “그래서?” 어느새 주위에 키 큰 녀석들이 모여들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그마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우리 친구하자고.” 봉채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고 우리는 그렇게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봉채가 귀한 것은 나이가 들어가며 신앙심이 깊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 나갈라치면 봉채 아내가 더 나를 만나려고 한다. 남편 친구 중에 ‘목사’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대견하고 좋은 모양이다. 아이들에게도 얼마나 내 얘기를 하는지 얼굴을 본적도 없는데 봉채 아이들에게 내 인기는 ‘아이돌’ 수준이다. 신앙이 없을 때는 만나면 고교 때 사고(?)치던 이야기만 했는데 이제는 만나면 신앙대화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제는 집사가 되고, 교회에서 “중보 기도팀”으로 봉사한다니 세상 참 오래살고 볼일이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정호”를 만났다. 그는 중학교 동창이다. 정호 아버지도 경찰이어서인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20대 초반에 소식이 끊어져 너무도 그리워했다. 몇 년 전에는 칼럼까지 쓰면서 찾으려고 했지만 소식은 감감했다. 그런데 작년(2011년) 5월에 기적적으로 소재를 파악하여 재회하게 되었다. 거의 30년 만이었다. 놀라웠다. 그는 ‘버지니아’에 살고 있었다. 큰 사업체를 경영하며 청소년 오케스트라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아내사이에 남매를 두고 말이다. 한 가지 변한 것은 그렇게 곱던 머리칼이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헐!”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고 가족들이 합석하는 자리도 가졌다.

정호는 나를 처음 교회로 인도해 준 친구이다. 억지로 웅변을 가르치며 장애 때문에 소극적인 삶을 살아가던 나를 대중 앞에 당당히 설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고마운 친구이다. 지난 5월 6일(주일) 오전 필라에서 예배를 마친 나는 아내와 함께 버지니아로 내달았다. 내 40년 친구의 “장로임직”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임직식 순서를 맡아 단에 올랐고 장로 임직 때 나는 목사님들과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감격스러웠다. 10대에 만난 내 친구 정호가 미국에서 ‘장로’로 세움을 받는 자리이다. 꿈만 같았다. “정호야, 진실한 장로되라!” 예배 후 “허그”하며 내가 들려준 말이다. 세월은 가지만 내 곁에는 친구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친구들과 마주앉으면 금방 그 추억의 자리로 돌아간다. “친구들아, 영원한 전설로 그렇게 살아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