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12월의 손짓 12/18/2012

by admin posted Nov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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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다. 세월이 왜 이리 빠른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우연히 집에 들른 사촌형이 “지금은 세월이 안가지? 나이 들어봐라. 세월이 점점 빨라진단다.”고 말할때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무료한 날들이 많았기에 어서 세월이 가기를 바란 때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형님의 말이 실감이 난다. 2012년 첫날을 맞이하며 가슴이 뛰었던 때가 저만치 보이는데 12월이 얄미운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성큼 다가서고 있다.

항상 그렇지만 정말 바쁘게 산 한해였다. 1월은 극단 <증언>팀의 “빈방 있습니까?” 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젊은 날, 대학로를 지나며 보고 싶었던 연극을 미국 땅에서 관람하게 될 줄이야! 전설의 인물인 덕구. 20대 후반부터 무려 31년 동안 오직 “덕구”역을 감당해 온 “박재련 장로”의 모습이 너무도 존경스러웠다. 그는 현재 동숭교회의 시무장로이며 <서울예술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 화려한 커리어를 모두 내려놓고 장애인 “덕구”가 되어 관중들을 끌고 다닌다. 천연덕스러운 바보연기를 하면서도 절제된 연기력으로 사람들의 눈에서 결국 하얀 액체를 뽑아내고야 만다.

2월에는 가슴 아픈 이별의 시간이 있었다. 18년 동안 전신마비로 고통스럽게 병상을 지키던 “정용”형제가 천국으로 길을 떠났다. 48년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매년 성탄절이 가까워오면 형제를 찾아갔다. 어떨 때는 하얀 눈을 맞으며 때로는 서늘한 겨울비를 바라보며 말이다. 집에 들어서면 정용 형제는 전신마비 장애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미소를 보내왔다. 천사의 미소를 잃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형제는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우리의 마음을 뒤로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갔다. 지금도 정용 형제의 환한 미소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정용의 모습을 아까워하시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시간보다 너무도 일찍 그 미소를 천국으로 옮겨가셨다.

10년 전. 밀알선교단 단장으로 부임 했을 당시 ‘전신마비 장애인’이 네 분이나 계셨다. “전신마비”란 말 그대로 목 아래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말한다. 전신마비 장애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욕창”이다.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되고 운동을 전혀 할 수 없기 때문에 살이 썪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몸을 청결하게 해주고 침대위에서 이리저리로 몸을 움직여 주어야 욕창을 막을 수 있다. 갑자기 몸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 들어가는 것은 전신마비 장애우 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다.

평생 전신마비로 힘들게 살던 “서돌근 형제”가 2006년. 28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작년 5월에는 “황승수 집사”님이 고통스러운 전신마비의 아픔을 털어내고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정용 형제마저 떠나버린 빈자리를 보며 허탈한 가슴을 달랠 길이 없다. 12월 끝자락에서 아기 예수님의 형상을 침상에 누워있는 그분들에게서 느낄 수 있어 좋았는데 말이다. 그분들과 만나는 날이 진정 성탄절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육신을 가졌지만 그분들의 심성은 순수했고 미소는 해맑았다.

아들 같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던 “조봉아 권사님”, 밀알에 오기만 하면 장애인들을 끌어안고 춤을 추시던 “장순자 권사님”, 형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싱긋이 웃으시며 다가서던 “홍준식 집사님” 야속한 세월이 그들을 모두 데려갔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인사 겸 이런 말을 건네 온다. “목사님, 힘든 사역을 하시네요.” 아니다. 나는 장애인들이 좋다. 아니 자랑스럽다. 우리는 만나면 웃는다. 때로는 서로의 아픔이 느껴져 함께 울기도 한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내 모습이 나는 좋다.

장애인들의 친구로 살아가는 내 삶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의 만남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만나면 행복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그 누가 알랴! 눈빛만 마주쳐도 마음의 그림을 잡아 낼 수 있는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다. 12월은 얄밉지만 그 따스함 때문에 추위속에서도 우리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