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을 보내며

by 관리자 posted May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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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jpg

 

 수요일 오후 급보가 날아들었다. 근간 몇 년 동안 숙환으로 고생하시던 장모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난감한 것은 월요일에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었다. 장모님이기에 한국에 나가긴 해야 하는데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월요일 뉴욕에서 열리는 행사는 내가 없으면 의미가 축소되는 위기 상황이다. 하지만 어쩌랴! 사위도 자식인데, 그것도 맏사위인 내가 멈칫거릴 틈이 없었다. 부랴부랴 표를 예약하여 새벽 비행기에 올랐다. 긴장이 풀리며 10시간을 곯아 떨어져 버렸다.

 

 금요일(3) 새벽녘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 기장의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53일입니다. 잠시 후 비행기는 ” “, 오늘이 내 생일이네!” 그렇게 금년 생일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며 맞이하고 사라졌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동서들과 처제들이 놀라는 눈으로 나를 맞이해 준다. 국화로 단장된 영정 앞에 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목사인 사위를 자랑스러워하며 사랑해 주시던 장모님이 유명을 달리한 채 사진 속에서 웃고 계셨다. “어머니~” 금새 흐느끼듯 눈물이 솟구쳤다. 내가 올 때면 너무도 반가워하며 달려 나오시던 장모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장모님과 나는 34년 전에 처음 만났다. 당시 50대였던 어머니는 멋쟁이요, 미인이셨다. 항상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장애를 가졌기에 아내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시간은 움추러 들 수밖에 없었다. 7 남매에 맏인 아내를 두 분은 몹시도 자랑스러워하셨다. 훤칠한 키에 예쁘디 예쁜 딸이 결혼하겠다고 통보해 왔을때에 너무도 좋아하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상대가 장애인 이라는 사실에 당황하셨다. 며칠 후 장인은 아내를 불러 앉혔다. “우리가 이 결혼을 반대하면 그 전도사님이 실족하겠지?”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성사된 상견례였다. 경직된 표정으로 만난 그 자리에서 장모님은 호감도 100%로 결혼을 승낙해 주셨다. 그것이 두 분, 아니 장모님에 대해 고마워하는 커다란 이유이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들른 처가에서 장모님은 그 지방에서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내 놓는다는 홍어를 상에 올렸다. 자신만만하게 입에 넣었던 삮힌 홍어의 자극적인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장모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2005. 장인, 장모님이 미국에 처음 방문해 주셨다. 목회의 어려움이 올 때마다 곁에서 기도하시며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분들. 미국에 꼭 한번 모시고 미국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그 작은 소망이 이루어 진 것이다. 장인, 장모님이 오시기 전날, 아내는 내 귀에 속삭였다. “내일 우리 엄마 온다!” 그날 밤 아내는 잠을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아내, 아이들, 나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두 분과 함께했다. 꿈같은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공항으로 가는 길, 이제는 두 분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에 차안에는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짐을 부치고, 두 분이 검색대를 향해 들어가신다. 저만치 두 분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두 손을 흔들었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을 빠져 나오며 뭔지 모를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차가 출발하고 우리 가족은 창밖을 응시한 채 흐느끼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내 드리지만 언젠가는 천국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오고야 말겠지?’ 그런데 세월이 흘러 실로 그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16녀와 연관된 조문객들은 줄을 이어 들어오고 힘들었지만 장모님을 새기며 장례는 순탄하고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염과 입관은 실로 잔인한 시간이었다. 화장터에서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을 기다리니 한줌의 재가 되어 인계되었다. 그렇게 장모님은 주님의 품에 안겼다. 장모님을 그리며 글을 쓰고 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은 살을 에이 듯 아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