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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가을이 되면 항상 김장을 담그셨다. 알이 잘 밴 배추를 골라 사서 다듬고 소금을 뿌리는 것은 항상 혼자 하셨다. 절궈 놓은 배추를 건져내어 김치를 담글 때면 어디선가 동네 아낙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는 인덕이 넘치고 손이 크셨다. 한창 김장을 담글 때 다가가면 어머니는 어느새 알아차리시고 야무지게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셨다. 비릿한 굴 내음과 함께 어머니의 사랑이 목구멍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겉절이가 좋다. 특히 오이소백이는 익어버리면 맛이 없다. 겉절이 일 때가 더 맛이 있다.

배추가 “맛을 제대로 내는 김치가 되려면 다섯 번 죽어야 한다”고 한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또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되어서 또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말이다. 아직 배추의 ‘기’가 꺾이지 않고 살아있을 때를 ‘겉절이’라고 한다. 싱싱하고 씹으면 “아삭아삭” 소리가 나며 풋성귀의 맛을 그대로 느끼는 시기이다.

반면 “묵은지”는 어떠한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묵은지”와 “신김치”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선 둘은 숙성기간부터 다르다. 신 김치가 그야말로 몇 주 정도 만에 손쉽게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에 비해 묵은 지는 1년, 혹은 3년에 걸쳐 오랜 시간동안 숙성시키기 때문이다. 묵은지를 제대로 숙성시키지 않으면 배추가 물러지거나 군내가 나 먹을 수 없게 된다. 담그는 법도 차이가 난다. 묵은지를 담글 때에는 젓갈이나 액젓을 넣지 않는다. 젓갈이나 액젓을 넣으면 배추가 쉬이 물러져서 아삭한 맛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젓갈 대신 찹쌀 풀을 빼서 담기도 한다. 이 외에도 군내가 나지 않고 무르지 않게 하기 위해 무채를 쓰지 않고 갈아서 넣는 것도 일반 김치와 묵은지 용 김치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왜 서두부터 “묵은지”와 “겉절이” 타령일까? <가정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니, 가정과 김치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필자가 지금부터 풀어보는 이야기를 주목해 보시면 그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과거의 가정은 “묵은지”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리타분하고 뭔가 원칙에 얽매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 지금은 “겉절이” 가정이 되었다. 시간이 걸리는 것을 싫어한다. 반응도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상큼해 보이기도 하지만 깊은 맛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가정의 위기는 묵은지의 은밀한 향을 잃어버리고 겉절이의 상큼함만 추구하기 때문인 것 같다.

과거의 가정은 묵은지 분위기였다. 밥을 해도 시간이 걸렸다. 가마솥에 쌀을 앉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처음에는 불소시게로 약하게 불을 붙이다가 불길이 올라오면 장작을 넣기 시작한다. 솥두껑이 ‘들썩’이며 쌀이 익어가는 가 싶으면 장작을 ‘살살’ 밖으로 끄집어내어 온도를 조절한다. 밥이 다 되어도 절대 솥두껑을 열지 않는다. 최소량의 불씨를 놓아둔 채 뜸을 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 가마솥에 밥은 하얀 뱃살을 드러낸다. 밥을 풀 때에도 절대 마구 푸지 않는다. 할아버지로부터 장유유서의 서열을 따라 그릇에 정성스레 밥을 담는다. 정성이 있었고 질서와 사랑이 있었다.

지금은 겉절이 시대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전기밥솥이 등장하였다. 대충 쌀을 앉히면 몇십분이 지나 자기가 밥을 만들어 낸다. “햇밥”은 그런 과정도 필요가 없다. 그냥 데피면 맛있는 밥이 상에 오른다. 식구들의 서열이 없다. 누구든지 배가 고픈 사람이 먼저 퍼서 먹으면 된다. 참 편리해 졌다. 실속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러는 중에 가정이라는 단단한 소속이 느슨 해 지기 시작하였다. 아이들만 놓아두고 어딘가 며칠을 다녀 와보면 밥은 아예 지어먹은 흔적이 없다. 거의 ‘페스트후드’로 끼니를 때운 것이다. 이제 신세대들은 ‘밥의 철학’을 잊은 지 오래다. 우리는 하얀 쌀밥에 고기 국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말이다.

묵은지 가정은 지켜야할 전통과 깊은 맛이 배어나오는 곳을 말한다. 옛날에는 집안에 전화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다. 그것도 꼭 거실이나 안방에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면 온 식구들이 관심을 가졌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둘 중에 하나였다. 가장 힘이 있는 아버지가 받는 가정이 있는가 하면 제일 나이가 어린 자녀가 받았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는 가정은 분위기가 엄했다. 친구들도 전화를 하기 꺼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런 가정에 비하면 아이가 전화를 받는 가정은 분위기가 민주주의적이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의 호출을 기다린다. 반응도 각각이었다. “누구야?”라고 물으며 전화기로 다가가거나 무조건 다가와 낚아채듯이 전화를 받거나 였다. 통화가 끝나면 가족들이 관심을 가지고 물어온다. “누구야? 무엇 때문에 전화를 했어?” 이것이 묵은지 가정의 따뜻함이었다.

묵은지 가정은 거의 한방에서 살았다. 그 당시 방은 ‘고무줄 방’이었다. 가끔 손님이 와도 수용능력에는 지장이 없었다. 온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누우면 잠이 들 때까지 그날에 있었던 이야기가 줄줄이 엮어져 나갔다. 비좁았지만 행복했다. 엉켜 자면서 가족이 있음이 너무도 소중했다. 가정에 텔레비전은 단 한 대였다. 시청을 안 할 때는 아예 문을 걸어 잠그도록 된 TV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TV 채널 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가 최대관심사였다. 집집마다 거의 아버지가 채널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온가족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으며 TV 시청을 하였다. 같이 웃고 함께 울며 TV를 통해 가족의 사랑은 깊어갔다. 따라서 TV 프로그램은 건전하고 아름다운 주제가 주를 이루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정이었다. 위로가 있고 격려와 사랑이 풍성하게 넘치는 곳 그곳이 바로 “묵은지 가정”이었다.

이제는 겉절이 가정이 되었다. 겉절이의 매력은 즉흥적인 맛이다. 기다리기를 싫어한다. 전통을 빨리 벗겨버리고 당장에 ‘짜릿함’에 몰두한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제각기 방이 있어 가족들의 생활이 분리된 지 오래다. TV가 방마다 있는 것은 이미 옛이야기다. 이제는 인터넷으로도 웬만한 영상물은 다 시청한다. 가족들끼리 이마를 마주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다는 인터넷으로 바깥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더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그게 신식이란다. 아이들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핸드폰으로 문자 메세지를 날리며 스피드 한 삶을 즐기고 있다. 김치는 몰라도 가정은 “묵은지”가 좋은 것 같다. 약간은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지만 가족들의 깊은 정이 배어나오는 그냥 함께만 있어도 좋은 그런 가정 말이다. 김치가 되기 위해 다섯 번이나 죽고 또 죽는 배추같이 삶의 깊은 맛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로 오늘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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