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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는 거의 한옥에서 살았다. 표현 그대로 ‘고래등’ 같은 거창한 한옥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박한 한옥에서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항상 드나드는 커다란 방문과 창은 거의 창호지로 빛을 조절해 주었다. 그 시절에는 유리가 거의 없었다. 가을이 오면 어머니는 김장과 함께 문마다 새로운 창호지를 부착하는 일로 분주하셨다. 문마다 걸려 있는 고리를 떼어 마당 곳곳에 눕혀 놓으면 장관을 이룬다. 커다란 창호지를 문 크기에 맞게 잘라내는 일도 큰일이지만 솥에 풀을 쑤는 일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이윽고 하이얀 창호지에 풀을 발라 문 위에 붙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풀을 먹여 눅눅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팽팽해지고 다 마른 후에 ‘살짝’ 두드리면 ‘소고’(小鼓)소리가 나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녁 무렵에 문들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방안 가득히 피어오르는 ‘풀냄새’를 맡으며 새로이 단장된 문들을 바라보면 마치 새집에 이사를 온 듯이 기분이 좋았다. 실로 창호지는 한옥의 정취를 깊숙이 느끼게 해 주는 기능을 다했다.

아침이 되면 한옥 구석구석 찬란한 빛이 들어온다. 창호지를 파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어린 나에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다. 창호지를 통해 빛은 순해지고 바람은 소통한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은은하게 방안에 끌어들이기도 하고 휘영청 밝은 달빛에 매화꽃 나뭇가지 그림자를 드리워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심(詩心)을 절로 우러나게 했던 종이가 ‘창호지’였다. 창호지는 반투명 투과성 소재이기 때문에 실내 공간을 밝게 만들어 준다. 또한 창호지는 햇빛이 파고들면 따스함만을 잡아주어 기분이 좋을 만큼의 온도를 만들어 주었다.

창호지는 “한지”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값비싼 페어 글라스(이중 유리 창문)보다 이중 창호지 문이 보온 효과가 높다고 주장한다. 한지의 우수성은 창문용으로 사용되는 창호지의 열적(보온) 성능에서도 잘 나타난다. 실제로 현대 기술의 산물인 창유리와의 열적 성능을 비교하니 창호지를 사용한 단순한 이중 창호지 문의 열적 효과가 더 높았다고 한다. 창호지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 문명 기술이 만들어 낸 어떤 종류의 창문 재료보다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다.

창호지는 눈에 안 보이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방문에 발라두면 환기는 물론,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창호지가 공기는 일정량을 통과시키면서도 먼지는 막아내는 기막힌 기능을 감당한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온돌에 장판을 발라 생활을 해야 했기에 방안에 습기가 많은 것과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창호지가 이 두 가지를 적당히 조절하는 기능을 해줌으로 항상 쾌적한 생활공간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주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했다. 그래서 창호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도 한다.

창호지가 자연 현상에 이처럼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창호지는 물에 약한 단점이 있지만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것은 물론이요,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고려시대에 개발된 한지는 궁중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을 기록해 놓는 종이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한지”라고도 불리 우는 창호지는 닥나무에서 채취를 한다.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 한지의 강한 특성은 한지를 몇 겹으로 바른 갑옷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는 한옥 대신 아파트가 삶의 보금자리가 되어가고 창호지를 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창호지 대신 다양한 모양과 재질의 유리가 문과 창을 대신하고 있다. 편리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삭막해 진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일까? 아침햇살을 ‘흠뻑’ 머금고 빛을 확장시키며 밤이 되면 은은한 달빛을 음미하게 만드는 창호지 문이 고즈넉이 들어앉은 그런 집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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