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2015.11.25 03:05

보리밭  8/12/2010

조회 수 6796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9973958_orig.jpg

 

 

삶은 참 분주하다. 한해를 시작 했는가 했는데 어느새 7월을 달리고 있다. 이달 말에 있는 “장애인 캠프”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분주함 중에도 나는 가끔 눈을 감고 내 어린 날을 추억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갑자기 “보리밭”이 떠올랐다. 파랗게 펼쳐진 보리밭 풍경이 내 가슴을 풍요롭게 한다. 보리밭 둑에 서면 저만치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어린 나에게 꿈을 주었다. 두 팔을 벌려 바람을 안아본다. 밭과 밭이 이어지는 사이에 서면 저절로 입술을 넘어오는 노래가 있었다. “보리밭”이었다.

「♪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박화목 시, 윤용하 작곡> 내가 기억하기는 가곡이 분명한데 가수 문정선이 부르면서 대중화되었고 나중에는 조영남도 취입을 하였다. 당시는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벽이 높았을 때인데 대중가수가 불러 의미를 더했다. 사춘기에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미 떠나온 보리밭의 추억을 떠올렸다.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했던 보리밭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은 여기가 미국 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 농사가 끝이 나면 보리를 심는 작업이 활기를 띤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싹이 올라오며 보리는 엄동설한의 고통을 겪기 시작한다. 이미 눈에 덮여버린 보리밭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녔다. 겨울방학을 맞이하면 추운 날은 구들장에 몸을 붙이고 살지만 조금만 날이 풀리고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는 그 밭에서 뒹굴며 눈싸움을 했다. 그러다가 봄방학을 맞이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농사일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우리는 수업 중에 보리밭으로 내몰렸다. 소위 “보리밟기”를 위해서이다. 봄이 오면 새싹이 돋느라 들떠 있는 흙을 밟아주어야 뿌리가 땅에 박혀 잘 자라기 때문이다. 보리밭에 일렬로 서서 차근차근 보리밭을 밟아나갔다. 개구 진 아이들은 장난도 치면서 말이다. 실로 보리밭 사잇길로 봄이 일어서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렇게 자라나기 시작한 보리는 금새 밭을 푸르르게 물들여 놓는다. 보리밭 들이 하늘만큼 청명하다. 새로 열어젖힌 봄을 보리밭 새 들판이 맞이한다. 잔설 희끗한 산자락을 달려온 냉정한 바람도, 눈비 머금은 구름더미도 보리밭 언덕에 이르러 마음을 고쳐먹는다. 향기로운 보리 새순에 뺨 비비며 뒹굴며 마음을 누그려 트리며 ‘아찔아찔’ 봄바람으로 거듭나는 곳이 보리밭이다. 푸르고 따뜻한 생명의 숨결, 언 땅 뚫고 돋아나 매서운 한파를 견뎌낸 새싹의 힘이다. 찬바람의 끝자락, 보리밭 언덕에서 만나는 봄 빛깔은 그래서 꽃밭보다 진하고 향기로 왔다. 어쩌다 보리밭 사잇길에서 동급생 여자아이와 마주치면 얼굴만 빨개져서 겨우 옆을 스쳐지나갔다. 집에 와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이 땅의 보리밭엔 보리 새순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음력 정월부터 사월까지, 맛있고 배고프고 코끝 찡한 이야기들, 봄바람처럼 번져가는 소문들이 스며 있는 곳이 보리밭이다. 정월 무렵 보리 새순을 뽑아내 된장을 넣어 끓이면 ‘구수한 보릿국’이 되었다. 막 솟아오른 보리 목을 뽑아내고 보릿대를 입에 물면 보리피리가 되었다. 아이들마다 입에 물고 불어대던 “보리피리”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중에 보리타작이 끝나고 보릿대를 잘라 끝에 비누거품을 물고 불어대면 영롱한 ‘비누방울’이 하늘을 날았다. 보리밭은 좋았지만 보리밥은 정말 싫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기 위해 세수를 할 때면 부엌을 향해 외치던 소리가 있었다. “엄마, 보리밥 좀 싸지 마!” 하지만 학교에 가서 ‘벤또’(도시락) 뚜껑을 열면 여전히 가슴에 줄이 간 보리밥이 웃고 있었다. 보리밥은 먹으면 금방 배가 고팠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쉴 새 없이 나오는 ‘방귀’였다. 그래서 옛날 아이들이 건강했는지도 모른다.

학교가 파하고 행길(한길)을 함께 걸어 나오던 친구들은 보리밭이 나타나는 어귀에서 헤어지게 된다. “내일보자!” 내젖는 손사래에 어린 날의 우정이 배어나왔다. 보리밭을 지나쳐가면 보리밭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는 농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다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인사를 잘했다. “오냐! 아, 이 순경 아들이구나!” 그러면서 올라오는 풀 내음이 ‘싸아~’ 하게 코끝에 번진다. 보리밭을 가르며 불어대는 휘파람이 어린 내 가슴을 부자로 만들었다.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쑥과 냉이를 캐는 아낙들의 입가에서도 절로 아지랑이 같은 웃음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보리밭이 가장 보기 좋은 때는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 무렵이다. 보릿대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올라 푸른빛이 한결 선명해지고, 바람이 불면 보리밭은 초록바다가 되어 눈부시게 일렁인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보리밭 빛깔도 다채롭게 바뀌며 짙고 연한 초록빛 색 잔치를 펼쳐 보인다. 그 보리밭이 5월 중순 이후부터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6월초 수확기를 맞는다. 사실 보리밭에 대한 느낌과 의미는 세대별로 달라진다. 아마 지금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싶다. 이제는 기계가 농사를 다지어 주고 있기 때문이요, 다 차량으로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 보리밭은 가슴에 사연을 심으며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주었다. ‘보릿고개’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보리밥은 싫도록 먹어 보았다.

보리가 한창 익어 갈 때면 우리는 손으로 훑어 보리를 비벼댔다. 배가 고플 때는 보리의 고소함이 허기를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불이 다 타고 남은 아궁이에 보릿대를 집어넣으면 ‘탁탁’ 소리를 내며 보리가 익어 입을 벌렸다. 그때 먹는 보리 맛은 일품이었다. 이렇게 풍요로운 때에 보리맛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현실이 아쉬운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제 다시 보리밭으로 가자! 들판에 파란 보리들이 바람결에 출렁이며 춤추는 모습에 흥이 나던 때가 있었다. 보리밭 벌판에는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사방에 보리 내음이 진동하던 그 때에 우리들은 들과 산으로 다니며 오디를 따먹었다. 산딸기를 만나면 대박이었다. 보리밭 언덕에 종다리가 하늘 높이 ‘지지배배’ 거리며 하늘에 줄을 긋는다. 짖궂은 아이들은 새알을 찾으러 풀숲을 헤매기도 하였다. 이젠, 그 보리밭이 드물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끝이 없이 이어지는 푸르름이 자리하고 있다. 추위를 이기고 사람들의 밟힘도 즐겁게 감당하고 풍성한 양식을 제공하던 보리밭 한가운데로 힘껏 발걸음을 내딛는다.


  1. 속을 모르겠어요! 5/9/2014

    남자들은 모이면 여자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도대체 여자들은 속을 모르겠어!”이다. 정말 여자는 팔색조이다. 연애 할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결혼을 해서 부부로 사는데도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여자이다. 어느 때는 ...
    Views68792
    Read More
  2. 동수와 경찰아저씨 5/2/2014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활이 힘들지만 언니 집으로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아요” 장애를 가진 자매의 하소연이다. 자매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저는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뇌성마비 1급 지체 장애를 가지고 ...
    Views65524
    Read More
  3. 슬퍼서 아름다운 노래 가수 김정호 4/26/2014

    누구나 미치도록 좋아하는 가수가 하나쯤은 있다. 나의 십대로부터 20대를 흘러가면서 내 마음 한켠에 시냇물을 만들어 준 가수가 있다. “김정호” 진정 내 십대에 아이돌은 “김정호”였다. 어쩌다가 김정호가 TV(흑백) 화면에 나타나...
    Views71845
    Read More
  4. 가슴 4/19/2014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기가 되면서 나는 참 힘든 시간을 보내야했다. 동네를 가로 질러 지나 갈 때면 길에 나와 놀던 아이들이 다리 저는 흉내를 내며 나를 놀려댔다. 아이들은 내가 듣기에 거북한 소리를 질러댔다. 게다가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
    Views62009
    Read More
  5. 남자를 위하여 4/12/2014

    이 지구상에 반은 남자이다.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남자들이 지구의 반을 디디고 살고 있다. 도대체 남자는 누구인가? 내가 어릴 때만해도 한국은 남성중심의 사회였다. 아버지가 가정의 축이었다. 새 학기에 작성하는 생활조사서 호주 난에는 당연히 아버...
    Views61095
    Read More
  6. 차라리 다리가 없으면--- 4/5/2014

    모두가 건강하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이란 단어자체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인생을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평생 시각장애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다리가 하나 없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앞이 보이지 않아 ...
    Views67194
    Read More
  7.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28/2014

    금년 겨울은 겨울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루하다고 해야 할까?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 며칠이 멀다하고 쏟아지는 폭설, 3월이 되어서도 내리는 눈은 눈치가 없는걸까? 봄을 시샘하는걸까? 특별히 사업을 하는 이민자들이 버텨내기에는 몹시 버거운 겨울이...
    Views60685
    Read More
  8. 음식맛은 장맛 3/23/2014

    갑자기 어린 시절, 집집 툇마루에 걸려있던 메주가 떠올랐다. 이제 제법 작가의 영감이 찾아온 모양이다. 흔히 사람들은 범상한 기준보다 떨어지는 외모를 가진 사람을 향해 메주덩어리에 비유한다. 메주가 들으면 화를 낼 일이다. 메주가 만들어지기까지 들...
    Views65121
    Read More
  9. 부부는 서로를 무서워한다 3/15/2014

    여기 남편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한 여인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실로 가부장적인 의식을 가지고 아내와 아이들을 호령한다. 누가보아도 간이 바깥으로 나온 사나이이다. 그런데 남편은 “나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아내라.”고 말을 ...
    Views63170
    Read More
  10. 장애인은 아름답습니다 3/8/2014

    한국에서 장애인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 준 영화가 있다. 2005년 개봉한 영화 <말아톤>은 그해 여름에 열린 대종상 영화제 7개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며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게 된다. 한 영화평론가는 “<말아톤>은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
    Views61732
    Read More
  11. 살맛나십니까? 3/3/2014

    인생은 무엇인가? 맛을 보는 것이다. 입맛이 있고 살맛이 있다. 입맛에는 단맛, 쓴맛, 매운맛, 짠맛, 신맛, 아린 맛등 다양하고 미묘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어떤 한 가지 맛만 누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달고, 쓰고, 시고, 짜고, 맵고, 싱겁고, 떫고...
    Views58016
    Read More
  12. 성도님, 이러시면 안됩니다! 2/25/2014

    목사님 한분이 상기된 얼굴로 설교 CD를 내게 보여주며 격앙된 어조로 넋두리를 한다. 이야기인 즉슨 교인 한사람이 이 CD를 주면서 “목사님도 이렇게 설교하실 수 없어요.” 하더라는 것이다. 순간 ‘오죽하면 그런 어필을 했을까?’라...
    Views64851
    Read More
  13. 남자들은 왜 그래요? 2/17/2014

    40대 후반의 한 중년 여인으로 부터 아주 긴 사연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기 남편이 이번에 부도가 났는데 그것도 두 번째라는 것이다. 그동안 느낌이 안 좋아서 물어보면 항상 “괜찮다.”라고 대답을 해왔다. “자기 걱정 하지 말고 자식들이...
    Views64612
    Read More
  14. 텍사스 밀알 선교단 2/9/2014

    연초부터 미주밀알에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워싱톤 밀알 “정택정 단장”이 정신 병동에 심방을 갔다가 장애인에게 무방비 상태에서 구타를 당해 뇌출혈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수술을 두 번이나 시도해도 뇌에 출혈은 멈추지 않는 급박한 상...
    Views69537
    Read More
  15. 교복을 벗고 2/2/2014

    한국에 갔을 때에 일이다. 친구가 꽃게탕을 잘하는 집이 있다며 굳이 “마장역 앞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사실 활어회는 몰라도 해물은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친구의 성의가 고마워 택시에 올랐다. 가다보니 신답십리 쪽이었고 장...
    Views71092
    Read More
  16. 건빵 1/28/2014

    나는 간식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우직하게 세끼 식사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은 입이 궁금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시장기가 돌았고 불현듯 생각 난 것이 건빵이었다. 60년대만 해도 간식은 고사하고 양식이 없어 굶주리...
    Views70224
    Read More
  17. 어디요? 1/20/2014

    한 신사가 시골길을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핸드폰을 꺼내 든다. 그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신호 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묻는다. “어디요?” 요사이는 워낙 전화기 성능이 좋아서 ...
    Views67481
    Read More
  18. 여자와 거울 1/11/2014

    거울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두메산골에 사는 한 부인네가 서울로 일을 보러 가는 남편에게 “거울을 사다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남편이 사온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아내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거울 속에 묘령의 여자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평...
    Views78313
    Read More
  19. 2014 첫 칼럼 행복을 이야기합시다! 1/4/2014

    새해가 밝았다. 처음 시작하는 시점은 사람들에게 뜻 모를 설레임을 준다. 해가 바뀌면 영어로 ‘Reset’하는 기분이 들어 좋다. ‘Reset’이 무엇인가? “장치의 일부 또는 시스템 전체를 미리 정해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Views64926
    Read More
  20. 세월, 바람 그리고 가슴으로 보낸다 12/30/2013

    한해가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은 누구나 회상에 젖는다. 이민생활이 워낙 각박해서 그럴 여유조차 없는 분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해의 높이가 낮아진 만큼 햇빛이 방안 깊숙이 파고 들어와 좋다. 반면 그 낮아진 햇빛에 비친 산 그림자...
    Views59353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5 Next
/ 35

주소: 423 Derstine Ave. Lansdale., PA 19446
Tel: (215) 913-3008
e-mail: philamilal@hotmail.com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