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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5 03:05

보리밭  8/1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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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 분주하다. 한해를 시작 했는가 했는데 어느새 7월을 달리고 있다. 이달 말에 있는 “장애인 캠프”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 분주함 중에도 나는 가끔 눈을 감고 내 어린 날을 추억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갑자기 “보리밭”이 떠올랐다. 파랗게 펼쳐진 보리밭 풍경이 내 가슴을 풍요롭게 한다. 보리밭 둑에 서면 저만치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어린 나에게 꿈을 주었다. 두 팔을 벌려 바람을 안아본다. 밭과 밭이 이어지는 사이에 서면 저절로 입술을 넘어오는 노래가 있었다. “보리밭”이었다.

「♪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박화목 시, 윤용하 작곡> 내가 기억하기는 가곡이 분명한데 가수 문정선이 부르면서 대중화되었고 나중에는 조영남도 취입을 하였다. 당시는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벽이 높았을 때인데 대중가수가 불러 의미를 더했다. 사춘기에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이미 떠나온 보리밭의 추억을 떠올렸다.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했던 보리밭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은 여기가 미국 땅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 농사가 끝이 나면 보리를 심는 작업이 활기를 띤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싹이 올라오며 보리는 엄동설한의 고통을 겪기 시작한다. 이미 눈에 덮여버린 보리밭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다녔다. 겨울방학을 맞이하면 추운 날은 구들장에 몸을 붙이고 살지만 조금만 날이 풀리고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날에는 그 밭에서 뒹굴며 눈싸움을 했다. 그러다가 봄방학을 맞이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농사일을 돕는다”는 명목 하에 우리는 수업 중에 보리밭으로 내몰렸다. 소위 “보리밟기”를 위해서이다. 봄이 오면 새싹이 돋느라 들떠 있는 흙을 밟아주어야 뿌리가 땅에 박혀 잘 자라기 때문이다. 보리밭에 일렬로 서서 차근차근 보리밭을 밟아나갔다. 개구 진 아이들은 장난도 치면서 말이다. 실로 보리밭 사잇길로 봄이 일어서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렇게 자라나기 시작한 보리는 금새 밭을 푸르르게 물들여 놓는다. 보리밭 들이 하늘만큼 청명하다. 새로 열어젖힌 봄을 보리밭 새 들판이 맞이한다. 잔설 희끗한 산자락을 달려온 냉정한 바람도, 눈비 머금은 구름더미도 보리밭 언덕에 이르러 마음을 고쳐먹는다. 향기로운 보리 새순에 뺨 비비며 뒹굴며 마음을 누그려 트리며 ‘아찔아찔’ 봄바람으로 거듭나는 곳이 보리밭이다. 푸르고 따뜻한 생명의 숨결, 언 땅 뚫고 돋아나 매서운 한파를 견뎌낸 새싹의 힘이다. 찬바람의 끝자락, 보리밭 언덕에서 만나는 봄 빛깔은 그래서 꽃밭보다 진하고 향기로 왔다. 어쩌다 보리밭 사잇길에서 동급생 여자아이와 마주치면 얼굴만 빨개져서 겨우 옆을 스쳐지나갔다. 집에 와서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이 땅의 보리밭엔 보리 새순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음력 정월부터 사월까지, 맛있고 배고프고 코끝 찡한 이야기들, 봄바람처럼 번져가는 소문들이 스며 있는 곳이 보리밭이다. 정월 무렵 보리 새순을 뽑아내 된장을 넣어 끓이면 ‘구수한 보릿국’이 되었다. 막 솟아오른 보리 목을 뽑아내고 보릿대를 입에 물면 보리피리가 되었다. 아이들마다 입에 물고 불어대던 “보리피리”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중에 보리타작이 끝나고 보릿대를 잘라 끝에 비누거품을 물고 불어대면 영롱한 ‘비누방울’이 하늘을 날았다. 보리밭은 좋았지만 보리밥은 정말 싫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가기 위해 세수를 할 때면 부엌을 향해 외치던 소리가 있었다. “엄마, 보리밥 좀 싸지 마!” 하지만 학교에 가서 ‘벤또’(도시락) 뚜껑을 열면 여전히 가슴에 줄이 간 보리밥이 웃고 있었다. 보리밥은 먹으면 금방 배가 고팠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쉴 새 없이 나오는 ‘방귀’였다. 그래서 옛날 아이들이 건강했는지도 모른다.

학교가 파하고 행길(한길)을 함께 걸어 나오던 친구들은 보리밭이 나타나는 어귀에서 헤어지게 된다. “내일보자!” 내젖는 손사래에 어린 날의 우정이 배어나왔다. 보리밭을 지나쳐가면 보리밭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는 농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다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인사를 잘했다. “오냐! 아, 이 순경 아들이구나!” 그러면서 올라오는 풀 내음이 ‘싸아~’ 하게 코끝에 번진다. 보리밭을 가르며 불어대는 휘파람이 어린 내 가슴을 부자로 만들었다.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쑥과 냉이를 캐는 아낙들의 입가에서도 절로 아지랑이 같은 웃음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보리밭이 가장 보기 좋은 때는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 무렵이다. 보릿대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올라 푸른빛이 한결 선명해지고, 바람이 불면 보리밭은 초록바다가 되어 눈부시게 일렁인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보리밭 빛깔도 다채롭게 바뀌며 짙고 연한 초록빛 색 잔치를 펼쳐 보인다. 그 보리밭이 5월 중순 이후부터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6월초 수확기를 맞는다. 사실 보리밭에 대한 느낌과 의미는 세대별로 달라진다. 아마 지금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싶다. 이제는 기계가 농사를 다지어 주고 있기 때문이요, 다 차량으로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 보리밭은 가슴에 사연을 심으며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주었다. ‘보릿고개’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보리밥은 싫도록 먹어 보았다.

보리가 한창 익어 갈 때면 우리는 손으로 훑어 보리를 비벼댔다. 배가 고플 때는 보리의 고소함이 허기를 달래주었기 때문이다. 불이 다 타고 남은 아궁이에 보릿대를 집어넣으면 ‘탁탁’ 소리를 내며 보리가 익어 입을 벌렸다. 그때 먹는 보리 맛은 일품이었다. 이렇게 풍요로운 때에 보리맛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현실이 아쉬운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제 다시 보리밭으로 가자! 들판에 파란 보리들이 바람결에 출렁이며 춤추는 모습에 흥이 나던 때가 있었다. 보리밭 벌판에는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사방에 보리 내음이 진동하던 그 때에 우리들은 들과 산으로 다니며 오디를 따먹었다. 산딸기를 만나면 대박이었다. 보리밭 언덕에 종다리가 하늘 높이 ‘지지배배’ 거리며 하늘에 줄을 긋는다. 짖궂은 아이들은 새알을 찾으러 풀숲을 헤매기도 하였다. 이젠, 그 보리밭이 드물다. 하지만 내 가슴에는 끝이 없이 이어지는 푸르름이 자리하고 있다. 추위를 이기고 사람들의 밟힘도 즐겁게 감당하고 풍성한 양식을 제공하던 보리밭 한가운데로 힘껏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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